코로나 펜데믹을 거치면서 ‘가게를 한다는 건 내가 들어갈 감옥을 짓는 것과 같다’는 말이 유행이다. 그래서 오픈한지 얼마 안 된 식당이 몇 달 만에 사라지거나 다른 가게로 바뀌는 일은 놀라울 것도 없는 일이 됐다. 그래서일까 여행을 하다가 노포라고 할 만한 오래된 식당을 만나면 행운처럼 느껴져 꼭 들어가 보게 된다.
사실 노포식당들은 겉보기는 허름하게 보이지만 내공이 강한 음식 맛으로 사람들에게 늘 사랑받는다. 이곳들의 공통점은 오랜 시간 동안 변하지 않는 맛과 넉넉한 인심이다. 노포(老鋪)라는 단어는 국어사전을 보면 대대로 물려 내려오는 점포를 말한다. 즉 노련한 가게. 숙달된 가게를 말한다. 그래서 오래된 가게를 고포(古鋪)라 하지 않고 사람처럼 늙은 가게 노포(老鋪)라고 하는지 알 것 같다.
대전 서구 둔산동 이마트 앞에 위치한 사리원 본점. 1950년 6·25전쟁 때 냉면의 고장으로 알려진 북한 황해도 사리원시에서 현재 김래현 대표의 증조모인 김봉득이 대전으로 피난을 내려와 대흥동에서 창업한 대전 최초의 북한식 정통 평양냉면 전문점이다.
이후 2대 할머니 옥인숙과 3대 아버지 김형근에 이어 현재 딸인 김래현 대표까지 73년 전통의 가업을 4대째 이어오고 있는 노포맛집이다.
특히 할머니 옥인숙 여사는 외조부 이재우 씨가 황해도 사리원역 부근에서 재령면옥을 운영했던 노하우와 전통까지 이어받았다고 한다. 2021년 중소벤처기업부 인증 백년가게로 선정됐다. 3층에는 전통 양념갈비찜으로 유명한 사리원 한정식도 운영하고 있다.
사리원의 평양냉면 육수는 특별하다. 소고기 사태 진 육수에 이틀에 한 번씩 담는 동치미를 숙성 배합해 만든다. 육향자체가 진하고 동치미 자체의 시원한 맛이 끝 맛이 깊고 여운이 남는 맛이다. 순수하면서도 담백하고 간도 적당해 자꾸 떠먹어도 부담이 없다. 70년 이상을 지켜온 노포만이 낼 수 있는 맛이다.
면발은 계절에 따라 배합비율이 달라지는 맞춤형으로 부드럽고 쫄깃한 것이 특징. 거친듯하면서도 차지고 도톰한 편인데 씹을수록 구수한 맛이 난다. 특히 여름에 메밀함량이 높으면 반죽할 때 삭을 수 있어 여름보다 겨울에 메밀함량이 높다고 한다. 그래서 냉면 마니아들은 겨울철에 냉면을 즐겨 찾는다고 한다. 변함없는 맛을 위해 식재료 거래처도 40년 이상 함께 한 곳이 많다고 한다.
고명으로 사태 살과 오이채, 배, 계란이 올라간다. 동치미육수와 고기육수의 적절한 균형이 조화로운 맛을 낸다. 조미료 없이 담백하고 슴슴한 평양냉면 본래의 맛과 정신을 변함없이 지켜가고 있다.
이런 냉면은 2018년 남북정상회담이 열렸을 때는 평양냉면이 인기를 끌면서 1000인분의 육수물량이 동나면서 냉면을 팔지 못하는 ‘완판신화’도 이뤄냈다고 한다.
특히 사리원의 자랑인 김치비빔은 2대 할머니 옥인숙 여사가 독자적으로 개발한 원조메뉴. 소 사태부위를 양념에 버무려 적당히 익은 김치와 함께 먹는 특색음식으로 김치를 따로 숙성시켜 볶는 것이 아니라 양념에 버무려 나오기 때문에 술안주에 인기가 많다. 특히 차게 해서 먹는 것이 특징인데 냉면과 함께 곁들여 먹으면 색다른 맛을 준다.
사리원은 평양냉면으로 유명하지만 겨울에는 돼지갈비와 불고기가 새해를 맞는 신년회식에 인기가 많다. 메뉴 구성상 예전부터 우리 조상들이 해오던 선주후면하기 딱 좋은 곳으로 연회석도 잘 갖춰져 있다. 돼지갈비는 간장 베이스로 파인애플, 배 등을 비롯해 12가지 천연재료로 만든 특제양념장에 일주일 저온 숙성해서 손님상에 낸다. 다른 곳과 달리 많이 달지 않아 자극적이지 않고 슴슴한 편이다. 부드러운 갈비는 면과 함께 싸 먹어도 일품이다. 특히 다른 곳과 달리 10가지 이상 나오는 밑반찬이 한정식처럼 푸짐하게 나오는 게 특징.
고기는 1인분 250g으로 표기되어 있다. 하지만 실제는 300g 이상으로 손님상에 낸다고 한다. 음식점을 하면 많이 퍼주고 베풀어야 한다는 것이 옥인숙 할머니의 유지라고 한다. 실제로 옥인숙 할머니는 살아생전에 독실한 기독교 신자(권사)로 늘 카운터에서 성경책을 보면서 어려운 사람. 배고픈 사람을 늘 도와주고 베풀었다고 한다.
김 대표도 그 유지를 받들어 대전 서구노인회 소속 생일을 맞이한 어르신들에게 생일상을 차려주는 봉사를 이어가고 푸드 뱅크, 교회 등에 수천만 원대 만두를 기부해 오고 있다고 한다.
김래현 대표는 29세 젊은 나이에 4대를 이었다, 18년 동안 노포맛집을 이끌어온 김 대표는 고려대 사범대를 졸업하고 잠시 교사생활 했다. 그리고 평소 대학교수의 꿈을 이루기 위해 대학원에 진학해 공부하던 중에 비보를 접하게 된다. 2001년 아버지 김형근 씨가 불의의 대형교통사고를 당하고 이어 2003년 2대 창업주 옥인숙 할머니가 유명을 달리하게 된다.
거기다 설상가상으로 2006년에는 어머니까지 별세하면서 뜻하지 않게 4대째 가업을 잇게 되면서 대학교수의 꿈을 버리고 본격 외식 경영일선에 나섰다. 김 대표는 처음에는 애증이 교차했다고 한다.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냉면 만드는 걸 보면서 자란 터라 생소한 것은 아니었지만 냉면과는 떼래야 뗄 수 없는 운명으로 여겼다고 한다.
그리고 2010년 대흥동 사리원면옥 매장을 정리한다. 그리고 신도심 둔산동으로 영업장을 이전하고 여기에 5층 현대식 건물을 짓고 사업을 확장해 사리원 본점으로 둔산 시대를 개막했다. 교통사고로 20년 동안 병상에 있던 아버지는 딸이 자랑스럽게 일궈 놓은 사리원을 뒤로 한 채 2021년 끝내 하늘나라로 떠났다고 한다.
“100년 전 사리원 재령면옥 시절의 전통방식을 지금까지도 그대로 재현해 내고 있습니다, 평양냉면은 간단한 음식처럼 보이지만 의외로 손이 많이 가는 음식입니다. 정성을 들여야만 깊은 맛을 내는 음식이라 정직하지 않으면 제대로 된 맛을 내기 어렵습니다. 70년 이상 오랜 시간 검증된 음식맛과 고객과 함께 쌓아온 신뢰를 져버리지 않도록 노력할 겁니다”
선대로부터 이어온 4대의 전통의 맛을 지켜내기 위한 김 대표의 각오도 새롭다.
오래된 가게들은 이유가 있다. 혀를 즐겁게 하는 맛, 손님의 취향에 맞는 분위기, 합리적인 가격, 진심으로 손님을 대하는 주인장의 태도까지 손님의 까다로운 기준들을 통과한 가게들이 한해한해 고비를 넘긴다. 그중에서도 전통의 맛을 간직해 내려오는 가게들이 최근 노포로 불리며 고유명사화되는 추세다.
음식점은 업력이 고객의 마음을 움직인다고 한다. 수많은 식당이 간판에 ‘SINCE 19XX’를 써 붙이고, 전국의 노포식당만 찾아다니는 식객들도 늘었다. 마치 오래된 고대유물을 발견하듯 노포맛집을 찾아 맛있는 한 끼를 위해 기꺼이 몇 시간을 기다리기도 하고 수십, 수백Km를 이동하기도 한다.
하지만 노포라고 하면 왠지 허름하고 오래된 식당만을 떠올릴 수 있겠지만, 맛있어서 오래 이어진 식당이 노포다. 욕쟁이 할머니식당이 살아남는 이유는 그 식당음식이 맛있어서다. 그래서 추억의 절반은 맛이라는 말이 있다,
냉면은 어디에서 먹느냐에 따라 맛의 차이가 확연하다. 4대를 거친 대전 사리원 본점도 일본 시니세(老鋪)나 유럽의 200년 이상 된 장수기업같이 오랜 전통을 가지고 추억까지 간직한 100년, 200년 노포맛집으로 이어가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