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전팔기’ 끝에 8천만원 고객 돈 지킨 사연은 [보이스피싱 막은 사람들②]

‘칠전팔기’ 끝에 8천만원 고객 돈 지킨 사연은 [보이스피싱 막은 사람들②]

[편집자주] 보이스피싱 피해가 연간 2000억원에 육박하고 있다. 지난 한 해 늘어난 피해액만 500억원에 달한다. 보이스피싱으로 고통받는 이들이 늘어나는 가운데 최일선에서 피해 예방에 고군분투하는 은행원들이 있다. 그들이 펼치는 피해 예방 노력과 현장에서의 어려운 속사정을 들어봤다. 

기사승인 2024-05-16 06:00:17
보이스피싱 사전 예방을 위해 꾸준한 홍보가 진행되지만 피해자들은 막상 자신이 보이스피싱에 당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사진=김동운 기자

“보이스피싱에 속은 고객들은 보면 딱 느껴집니다. ‘아, 속아서 왔구나’ 라고 말이죠. 문제는 보이스피싱에 당한 고객들은 자신이 보이스피싱에 당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여기서부터 현장의 은행원들의 끈기가 필요합니다”

보이스피싱은 악랄하다. 모든 금융사기가 그렇지만 사람의 믿음을 거침없이 배신하고 깊은 상흔을 남긴다는 점에서 더욱 심각하다. 이를 막고자 정부를 비롯해 금융당국, 경찰, 금융사들이 모두 나서서 수법을 알리고 적발을 강화하는 등 ‘보이스피싱과의 전쟁’은 현재진행형이다.

보이스피싱과의 전쟁 최전방에서 고객들을 상대하는 은행 영업점 직원들은 보이스피싱에 속아넘어간 고객들을 마주한다. 쿠키뉴스가 14일 만난 KB국민은행 한 영업점의 김명일(가명) 팀장은 지난달 오후에 일어난 일을 회상했다.

늦은 오후 출금 요청에 ‘보이스피싱 직감’…경찰 설득도 통하지 않았다

사건은 오후 5시경 시작됐다. 국민은행은 ‘9 to 6 뱅크’를 도입했는데, 도입 영업점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운영하기에 일반 영업점보다 마감을 늦게 한다. 김 팀장은 오후 5시에 “출금 업무를 보러 방문할 수 있겠냐”는 문의전화 뒤 방문한 A씨(60대·여성)를 맞이했다. 김 팀장은 A씨가 8000만원을 출금하겠다는 말에 보이스피싱임을 직감했다.

김 팀장은 “일반 영업점에서 현금을 8000만원이나 인출하는 경우는 사실상 없다고 봐도 된다”며 “A씨가 현금을 찾으러 왔다고 말한 순간 직원들과 눈을 마주치며 ‘100%’ 보이스피싱에 속았다고 느꼈다”고 설명했다.

보이스피싱임을 알아챈 김 팀장은 출금 목적에 대해 확인했고, A씨는 카페 인테리어 리모델링을 위해 출금한다고 답변했다. 이에 김 팀장이 수표를 이용하거나 계좌이체를 권유했지만, 출금을 고집하는 A씨의 모습을 보고 경찰에 신고했다. 이는 금융사가 500만원 이상 현금인출자가 있을 경우  경찰에게 의무적으로 신고하는 협약을 맺었기 때문이다. 대체로 이 과정에서 출동한 경찰의 설득으로 고객이 보이스피싱에 당했음을 알아차린다.

하지만 A씨의 경우 완강히 자신이 보이스피싱에 당한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때부터 사건 해결은 복잡해진다. 경찰이 강제적으로 출금을 막을 수 없다 보니 온전히 고객을 담당하는 은행원의 판단에 보이스피싱을 막을 수 있는지 여부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김 팀장은 “A씨가 보이스피싱 일당에게 완전히 속아서 아무리 설득해도 출금 요청을 철회하지 않았다”며 “여기서 내가 포기하고 그대로 8000만원을 넘겨주면 그 돈은 고스란히 범죄자들에게 넘어가게 될 상황이었다”고 설명했다.

국민은행의 보이스피싱 예방 안내문.   사진=김동운 기자

‘지성이면 감천’… 플랜B 노력에 보이스피싱 피해 예방 성공

이에 김 팀장은 최대한 A씨가 출금 이후의 정황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노력했다. A씨는 출금한 금액을 B동 행정복지센터에서 만나 전달할 것과 전달 후 제사를 위해 C지역으로 이동한다는 이야기까지 들었다. 현금을 A씨의 차까지 전달해준다는 이유로 주차장까지 나와 차량번호도 파악했다. 오후 6시 마감시간이 가까워져 출금을 막지 못했지만, 경찰에게 재차 신고한 뒤 정보를 전달해 보이스피싱 수거책에게 현금 전달을 막겠다는 ‘플랜 B’를 세운 것이다.

A씨가 떠난 직후 김 팀장은 경찰에 재차 신고해 일련의 사건 경위를 전달하고 퇴근했다. 하지만 김 팀장은 퇴근 이후에 마음이 무거워 잠을 자지 못했다고 회상했다. 김 팀장은 “영업점 직원으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지만 은행 내에서 막지 못한 것이 너무나도 마음에 걸렸다”며 “만약 고객이 결국 보이스피싱에 당한 사실을 알게 되면 피해자 뿐 아니라 은행원들도 몇 개월을 넘어 몇 년간 트라우마로 남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같은 정성이 하늘에 닿은 것일까. 김 팀장은 다음날 경찰로부터 보이스피싱 피해가 발생하지 않았다는 소식을 접하게 됐다. 경찰이 설명해준 내용에 따르면 A씨가 돈을 전달하기 위해 B동 행정복지센터에 갔지만 수거책이 오지 않았다. 출금이 늦어진 것을 알게 된 일당들이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이후 제사를 지내기 위해 C지역으로 이동하는 것을 차량 추적으로 알게 된 경찰은 C지역의 경찰에게 사건 내용을 전달하고 지원을 요청했다. C지역의 경찰들도 인적사항을 파악해 A씨의 남동생에게 A씨가 집에 도착했는지 파악했고, 현금 8000만원은 C지역의 국민은행 지점에 다시 입금됐다. 말 그대로 ‘칠전팔기’ 끝에 보이스피싱을 막아낸 것이다.

“보이스피싱 예방 최전선, 은행원들이 자부심 가져주길”

김 팀장은 “수상한 기미를 감지하고 일선 행원들이 고객들에게 출금 목적을 묻는다”며 “이때 고객들이 불쾌하다는 반응을 보이며 화를 내거나 민원을 제기해 일선 영업점 직원들이 민원 대응에 고충을 겪는 경우가 참 많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은행원들이 나쁜 마음으로 고객들에게 질문을 드리는게 절대 아니니 출금 목적같은 질문을 받는다면 너무 불쾌해 하지 않아주셨으면 좋겠다”고 요청했다. 이어 “일선 영업점 직원들이 민원이나 항의에 굴하지 않길 바란다”며 “수고롭더라도 고객 피해를 예방하면 은행원으로서의 자부심을 지켜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동운 기자 chobits3095@kukinews.com

김동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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