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왕가(李王家)박물관이 한일합방 직전, 한 일본인으로부터 돈을 주고 천안 성거산 천흥사 동종을 샀다.” 국립중앙박물관이 밝힌 천흥사 종 구입 내역은 놀라웠다. 경기도 광주 남한산성 종루에 걸려있던 종이 어떻게 박물관으로 팔려갈 수 있었을까. 일본인 문화재 사냥꾼이 공기관 소장품을 도둑질한 것이다. 이 종은 8개월 전 통감부가 공식적 고적조사를 진행한 문화재였다.
국가기관인 이왕가박물관은 이런 장물을 매입했다. 이 박물관은 1908년 일제에 의해 순종이 있던 창덕궁 옆 창경궁에 식물원·동물원과 함께 처음 만들어졌다. 허수아비가 된 조선 황제 위안거리로 총리대신 이완용이 제안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듬해 11월 일반 개방됐다. 조선왕실을 낮춰 부르는 이왕가가 박물관 이름에 붙여졌다.
전시 유물이 부족했던 박물관은 대대적인 수집활동을 폈다. 일본 호리꾼(도굴범)들이 대거 상륙해 개성·강화도 등 고분을 파헤칠 때였다. 초대통감 이토 히로부미까지 고려청자를 마구 사들여, 문화재 사냥이 기승을 부렸다.
박물관을 관리하던 궁내부 차관 고미야 사보마쓰 등이 골동품상을 접촉해 도굴을 부추겼다. “고미야는 매일 아침 골동상 물건을 보고 본인이 감정한 뒤 하루가 멀다하고 사들였다. 고미야 관저 한 방에는 사 모은 도굴품들이 상자에 담긴 채로 벽장 등에 가득 채워져 있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는 증언이 있다. 아예 박물관이 신문에 유물구입 광고까지 냈다.
“이번에 박물관부에서 진열품으로 우리나라의 미술공예품 중 오래되고 탁월한 물건 및 역사상 참고가 될 물건을 구입하게 되었으니, 팔기를 원하는 자는 목요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2시 사이에 창덕궁 금호문 바깥 장례원 앞 청사에 현품(現品)을 가지고 오면, 직원이 출장 감사 후 구입할 것이다.” (황성신문 1910년 2월 17일)
1010년 제작해 900년 된 천흥사 종은 ‘오래되고 탁월한 미술공예품’이었다. 요시다 구스케가 광주부(남한산성)가 200여 년 사용하던 천흥사 종을 종루서 떼 내 280원 받고 이왕가박물관에 팔아넘긴 건 신문 광고 5개월 후였다. 대동강 물을 팔아먹은 봉이 김선달도 혀를 내두를 일이다.
일제 문화재 약탈사를 처음 정리한 이구열은 “일본인들은 이 땅을 강점한 일제의 강세를 배경으로 거리낌 없이 조선인을 협박하고 공갈하며 최소의 돈으로 그들을 매수해서, 값나갈 유물을 아무 데서나 불법 반출한 악질적인 골동상 패거리였다”고 했다. 한 순간 벼락부자가 되니 물불 가리지 않았다. 이떄 박물관은 포도·어린이 그림이 있는 조롱박 모양 청자를 950원 고가에 사들여 화제가 됐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사유의 방’에 전시 중인 미륵반가사유상은 1912년 일본인 고물상에게 거금 2600원 주고 샀다. 왕실 재산을 유물 구입으로 거덜내는 게 일제 속셈인 듯했다.
이런 이왕가박물관의 무차별적 유물 수집을 감사해야 할까. 적어도 오구라, 이치다 등의 손에 들어가 일본으로 넘어가진 않았으니 말이다. 아름다운 자태의 부여 출토 백제금동불상은 이치다가 일본으로 가져갔고, 현 점유자가 우리 측에 100억원 이상을 요구하고 있다.
근데 참 신기하다. 높이 187cm에 무게가 1.75톤 나가는 천흥사 종을 어찌 옮겼을까. 남한산성에서 창경궁까지 30여 km 먼 길이다. 비슷한 시기 양평 용문사 종은 서울 남산의 일본 사찰까지 옮기는데 운반비로 515원을 지출했다.
문화재도 미인박명인 모양이다. 천흥사 종의 역마살이 기구하다. 400년 넘게 있던 천안 천흥사를 떠나더니 남한산성-창경궁-덕수궁-경복궁-용산 등을 전전했다. 환지본처(還至本處), 이제 본래 자리로 돌아와 안식을 찾아야 할 때다.
/천안·아산 선임기자
[참고] 이구열 ‘한국 문화재 수난사’(돌베개, 1996)/ 목수현 ‘일제하 이왕가박물관의 식민지적 성격’(미술사학연구 227, 2000)/ 박소현 ‘고려자기는 어떻게 미술이 되었나-식민지시대 고려자기 열광과 이왕가박물관의 정치학’(사회연구 11,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