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삶이 끝나는 순간 또 다른 누군가의 삶은 다시 시작된다. 장기 기증이 이를 가능케 한다. 생명을 나누는 장기 기증은 단순한 선택이 아닌 세상에 남기는 가장 아름다운 유산이다. 이식이 필요한 환자들은 수년의 시간을 힘겹게 버티며 기적을 꿈꾸지만 기증자는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쿠키뉴스는 4편에 걸쳐 생애 마지막 순간 고귀한 나눔을 실천한 이들과 새로운 삶을 건네받아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장기 기증의 숭고함을 조명한다. [편집자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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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성당에 가서 가슴에 손을 대고 기도해요. ‘내게 와줘서 고맙다’라고요. 장기 기증을 받고 더 열심히 봉사하며 살고 있어요.”
강옥예(70·여·경기 안산시)씨는 지난 2018년 4월 속이 메스껍고 얼굴이 누렇게 변해 병원을 찾았다. 급성간부전이었다. 당장 간 이식이 필요할 정도로 상태가 나빴다. 가족들로부터 생체 간 이식을 받으려고 해도 딸은 혈액형이 맞지 않았다. 작은 사위도 이식이 적합하지 않았다. 의료진마저 포기하고 있을 때쯤 다른 병원에서 뇌사자가 생겼다는 연락이 왔다. 연계를 받아 이식을 진행했고, 다행히 수술은 잘 끝났다. 이식받은 간의 크기가 크고 지방간이 있어 회복과 관리는 강씨의 몫이었다. 지금은 면역억제제를 복용하며 건강하게 지내고 있다. 건강을 되찾은 강씨는 그해 12월 기증자의 유가족과 이식을 받은 수혜자, 기증 희망등록자들로 구성된 ‘생명의소리 합창단’에 입단했다.
“합창단에 처음 갔을 때 기증자 유가족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랐어요. 스스로가 죄인처럼 느껴졌죠. 유가족 분들이 너무 잘해줬어요. 지금은 미안한 마음을 떨쳐내고 열심히 활동하고 있어요. 봉사는 아프기 전부터 해왔는데 기증을 받고나서 더 열심히 하고 있어요. 그간 이어진 봉사시간이 4600시간에 달합니다.”
같은 합창단에서 활동하고 있는 김영희(70·여·서울 송파구)씨는 2004년 11월 급성심부전으로 심장 이식을 받았다. 이식받기 전엔 제대로 숨을 쉬기 어려웠다. 지금은 3~4개월에 한 번씩 병원 검사를 받으며 우쿨렐레 강사로 생활하고 있다. 장기 기증 희망등록도 마쳤다. 김씨도 합창단 활동 초반엔 자신이 죄인 같이 느껴졌다고 했다.
“기증자 유가족들 앞에서 얼굴을 들기 힘들었어요. 간도, 콩팥도 아닌 심장을 받았잖아요. 이들 가족 중 누군가가 죽었기 때문에 내가 산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한 공간에 있기가 괴로웠어요. 그런데 그분들이 저한테 건강하게 지내줘서 고맙다는 거예요. ‘내가 더 밝게 사는 게 이분들에 대한 보답이겠구나’라고 생각했어요.”
해마다 늘어나는 장기 이식 대기 기간
강씨와 김씨처럼 장기 이식을 통해 새 삶을 살아갈 수 있지만 대부분의 이식 대기자는 오랜 기간 동안 기증자를 기다리다 세상을 떠난다. 박희승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국립장기조직혈액관리원(KONOS)으로부터 받은 자료에 따르면, 매년 장기 이식 대기 중 사망자는 2000명을 웃돈다. 2022년과 2023년에 사망한 환자는 각각 2918명, 2907명으로 3000명에 육박했다. 하루 평균 8명꼴이다. 2019년에서 2024년 6월까지 이식 대기 중 사망자는 1만4159명에 달한다. 신장 이식 대기 사망자가 6994명(49.4%)으로 가장 많았고, 간장 5652명(39.9%), 심장 634명(4.5%), 폐 542명(3.8%), 췌장 320명(2.3%) 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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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 이식 대기자는 해마다 늘고 있다. 2019년 3만2990명이던 이식 대기자는 2023년 4만3421명으로 5년 새 1.3배 증가했다. 이식을 위한 대기 기간도 길어졌다. 신장 이식의 경우 평균 대기일은 2019년 2196일에서 2024년 2802일로 늘어났다. 췌장은 1263일에서 2104일, 심장은 211일에서 385일로 늘었다.
기증자가 나타나지 않아 속이 타는 건 의료진도 마찬가지다. 황정기 은평성모병원 ‘김수환 추기경 기념’ 장기이식병원장(혈관이식외과 교수)의 환자 중에는 3년째 소장 이식을 기다리는 15세 중학생이 있다. 황 병원장은 “이 학생은 장에 괴사가 생겨 소장이 없는 상태로 매달 진료를 보러 온다. 먹고 싶은 걸 마음대로 못 먹는 등 불편할 텐데 올 때마다 밝은 모습이다”라며 “우리 의료진이 꼭 해결하고 싶은 과제다”라고 말했다.
장기 이식 대기자에 비해 기증자 수는 턱없이 적다. 2023년 뇌사자 기증 건수는 483건에 불과하다. 지난해엔 397명으로 전년 대비 17.8% 줄었다. 뇌사 장기 기증자가 400명 이하를 기록한 건 2011년 368명 이후 13년 만에 처음이다. 의료계에선 1년간 지속된 의료공백 상황으로 인해 기증자 수가 감소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뇌사 환자가 기증 의사를 밝혔더라도 가족의 동의 없이는 기증이 불가능한 만큼 가족을 설득하는 일이 중요한데 작년엔 전공의 사직 여파로 기존 의료진이 소진되면서 이런 노력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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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진 은평성모병원 장기이식코디네이터는 “뇌사는 보호자가 마음의 준비를 할 새도 없이 갑작스럽게 발생하는 경우가 많아 의료진이 장기 기증에 대해 설명하는 게 조심스럽다”면서 “기증 희망등록이 돼 있으면 가족들이 받아들이기 수월한데 그렇지 않을 땐 기증 제안을 단칼에 자르는 사례가 많다”고 토로했다. 박연호 가천대 길병원 장기이식센터장도 “본인이 기증을 원해도 뇌사 상태에서 최종적으로 기증 여부를 결정하는 건 가족”이라며 “내가 사랑하는 가족의 장기를 누군가에게 기증하기 위해 가족을 다시 차가운 수술대 위에 세우려면 큰 용기가 필요하다”라고 부연했다.
“장기 기증,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꾸는 일”
보건복지부는 2021년 ‘장기·인체 조직 기증 활성화 기본계획’을 통해 2025년까지 인구 100만 명당 뇌사 장기 기증자를 15명으로 끌어올리겠단 목표를 제시한 바 있다. KONOS에 따르면 2019년 기준 국내 인구 100만 명당 뇌사 장기 기증자는 8.68명으로 스페인(48.9명), 미국(36.98명), 영국(24.88명), 이탈리아(24.7명) 등에 한참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다.
박 센터장은 “외국에서 간 이식을 받기 위해 한국을 찾을 정도로 국내 장기 이식 수준 자체는 세계 최고이지만 뇌사 장기 기증 건수는 한참 적다”라며 “한 사람의 기증으로 많은 사람이 극적인 회복과 새로운 생명을 얻는다. 1명의 뇌사 장기 기증으로 평균 3~4명, 많게는 7~8명의 환자가 새로운 삶을 찾게 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단순히 한 사람을 건강하게 만드는 것을 넘어 인생관 자체를 바꿔버리는 게 장기 기증이라고 짚었다. 박 센터장에 따르면 지난 2023년 평소 우울증을 앓던 20대 초반 여성 환자가 약물을 과다 복용해 의식을 잃고 응급실에 실려온 적이 있다. 의료진이 간신히 회복시켰지만 사망 직전에 이를 정도로 심한 간부전에 빠졌다. 운 좋게 응급 간 이식을 받아 한 달간 병원 치료 후 퇴원했다. 이 일을 계기로 일상을 다시 시작한 환자는 입시를 치르고 올해 3월 대학에 입학한다.
박 센터장은 “장기 기증은 못 쓰는 장기 하나를 교체해 주는 것을 넘어 한 사람의 삶과 태도를 바꾸고 더 나아가 인생 자체를 변화시킬 수 있는 값지고 숭고한 행위다”라며 “기증자 예우 강화와 함께 이들의 선한 영향력이 기증 활성화로 이어지길 바란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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