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의약품 수입관세 인상 압박 속에서 글로벌 제약사들이 미국 공장 이전에 나서고 있다. 국내 제약바이오 기업들도 수출 확대를 위해 미국 현지 생산기지 확보 등 대응전략을 마련하고 있다.
5일 업계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 한 달 사이 중국에 대한 관세 부과를 시작으로 유럽연합(EU)을 비롯한 전 세계를 대상으로 상호관세 압박을 이어가고 있다. 해외 기업들의 투자를 이끌어내 미국을 제조업 중심지로 만들기 위한 포석으로 읽힌다.
급진적 관세정책 추진에 따라 미국에 의약품이나 원료를 수출하는 제약바이오 기업들은 비상 상황이다. 2기 트럼프 행정부가 외국에서 생산된 의약품에도 관세를 메기겠다고 예고했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18일(현지시간) 기자회견에서 의약품 관세 관련 질문에 “25% 이상이 될 것”이라며 “관세는 1년에 걸쳐 더 인상될 것”이라고 말했다. 관세 폭풍을 피할 길은 미국 안에 생산 공장을 두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에서 생산하면 관세를 내지 않아도 되므로 공장을 둘 수 있게 기회를 주고 싶다”고 밝혔다.
글로벌 빅파마들은 발 빠르게 움직였다. 세계 시가총액 1위 제약사인 일라이 릴리는 미국 내 제조시설에 대한 대규모 투자 계획을 발표했다. 일라이 릴리는 270억달러(한화 약 38조6000억원)를 투자해 5년 내 가동을 목표로 4개의 제조공장을 건설할 예정이다. 일라이 릴리는 지난 2020~2024년에도 미국 내 제조 입지를 늘리기 위해 230억달러(약 33조3800억원)를 투입한 바 있다. 현재 일라이 릴리는 9개 국가에 생산시설을 두고 있다.
코로나19 백신 개발로 유명한 화이자도 미국 공장 이전 가능성을 시사했다. 로이터 등 외신에 따르면 앨버트 불라 화이자 최고경영자(CEO)는 3일(현지시간) TD 코웬 헬스케어 컨퍼런스에서 “필요하다면 해외 제조 시설을 미국의 기존 공장으로 이전할 수 있다”며 “우리는 미국에 제조 능력을 갖추고 있으며 제조공장들은 적절한 생산력을 유지하고 있다”고 발언했다. 현재 화이자는 미국에 10개의 제조공장과 2개의 유통센터를 보유하고 있다.
빅파마들의 이같은 움직임은 다른 제약사에도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한국바이오협회 바이오경제연구센터는 “이번 일라이 릴리 발표로 다른 제약사들의 (미국 현지 공장) 투자 검토가 속도를 낼 것으로 보인다”면서 “해외 기업의 미국 내 제조 투자 여부는 구체적인 수입의약품 관세 부과 방안 발표 후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트럼프 정부의 수입의약품 관세 정책은 오는 4월 윤곽을 드러낼 것으로 예상된다.

관세가 적용될 경우 국산 의약품은 치명상을 입을 수 있다. 한국의 의약품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따라 필수품으로 분류돼 무관세 혜택을 받고 있다. 관세가 붙으면 가격 경쟁력 하락이 불가피하다. 그렇다고 해서 미국 시장을 포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미국은 글로벌 의약품 시장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내에서 미국으로 완제의약품을 수출하는 대표적 기업은 셀트리온, SK바이오팜 등이 있다.
트럼프 정부의 관세 위협에 한국 제약사들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일부 회사는 선제적 대응에 나섰다. 셀트리온은 올해 미국에서 판매 예정인 제품에 대해 지난 1월 말 기준 약 9개월분의 재고 이전을 완료했다. 또 현지 위탁생산(CMO) 업체들과 제품 생산 협력 방안을 협의해 관세 부과 시 완제의약품보다 세 부담이 훨씬 낮은 원료의약품 수출에 집중하고 있다. 셀트리온 측은 “관세 영향을 최소화할 수 있는 전략을 갖췄다”면서 “미국 현지 원료의약품 생산시설 확보도 올해 상반기 중 투자 결정을 마무리해 지속 가능한 보호무역 리스크 대책을 세우겠다”고 강조했다.
SK바이오팜은 캐나다 소재 CMO 업체에 제공한 원료의약품으로 완제의약품을 만들어 미국 시장에 공급하고 있다. 특히 지난해 회사 매출 성장에 크게 기여한 뇌전증 신약 ‘세노바메이트’(미국 제품명 엑스코프리)의 미국 내 CMO 시설을 확보했다. 의약품 재고는 약 6개월분을 확보한 상태다.
롯데바이오로직스(롯바)는 지난 2022년 미국 브리스톨마이어스스퀴브(BMS)로부터 시러큐스 공장을 인수했다. 롯바는 공장 인수 후 시설을 개선해 항체약물접합체(ADC) 생산 시설 확장을 추진하고 있다.
업계에선 수입 의약품에 보편관세가 적용될 경우 미국에서 한국산 의약품의 가격 경쟁력이 낮아지고, 한국에 들어올 땐 국내 소비자 부담이 늘어날 수 있다며 정부와 산업계가 공동 대응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보건의료 정책에 정통한 한 업계 관계자는 쿠키뉴스와의 통화에서 “미국에서 생산한 의약품이 국내로 들어왔을 때 소비자 가격이 오를 가능성이 있다”며 “필수의약품은 미국 우선 판매로 국내에서 수급 불안정 문제가 커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제약 산업 육성 정책을 통해 우리나라 제약사가 국내에서도 충분히 자생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