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일부 지역의 부족한 장기요양시설 공백을 메우기 위해 타인 소유의 사유지나 건물을 임대한 임차인도 요양시설 설치·운용이 가능하도록 하는 방안을 추진하는 가운데, 기존 장기요양기관들이 ‘돌봄의 시장화’를 초래할 거라며 거세게 반발하고 나섰다. 반면 요양시설 임대 허용을 오랜 기간 요청해왔던 보험업계는 요양서비스 산업 진출에 대한 기대감에 부풀어있다. 양측의 이해관계가 상충하며 적지 않은 파장이 일고 있다.
국민건강보험공단(건보공단)은 19일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신 노년층을 위한 요양시설 서비스 활성화 방안 공청회’를 개최했다.
현행 노인복지법 시행규칙에 따르면, 10명 이상이 이용하는 노인요양시설을 설치하려면 토지나 건물을 사업자가 소유해야 한다. 아니면 국가 또는 지방자치단체가 공공임차를 해야 가능하다. 입소 노인의 안정과 무분별한 시설 난립을 막기 위한 일종의 규제 장치인 셈인데, 보건복지부는 임차인도 요양시설 설치·운용이 가능하도록 시행규칙 개정을 검토하고 있다. 규제를 풀어 시설 공급을 확대하려는 것이다.
이에 건보공단은 2020년 들어 노인이 된 1953~1959년생 베이비부머 세대를 ‘신 노년층’으로 정의하고, 이들의 다양한 욕구를 반영한 요양시설을 공급하기 위해 지난 5월부터 관련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도시 등 거주지와 가까운 곳에서 신 노년층이 요양시설을 편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시설 운영 현황을 파악하고 제도를 정비해 요양서비스의 질을 향상시킨다는 게 이번 연구의 목적이다.
“지역별 요양시설 불균형”…공급 부족한 지역부터 임대
연구를 맡은 문용필 광주대학교 교수는 “베이비부머 세대는 농촌 지역보다는 도시에 거주하는 경향이 높다. 도시 지역의 요양서비스 수요는 증가할 것”이라며 “베이비부머 세대가 80~90세가 되는 시기를 선제적으로 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문 교수 연구에 따르면 인구 고령화로 인해 장기요양등급 인정자는 계속 늘어날 전망이다. 지난 2022년 86만명 수준인 75세 이상 인정자 수는 오는 2040년 226만명으로 증가할 것으로 예측됐다. 주로 시설에 입소하는 중증 환자인 1·2등급 인정자 수는 같은 기간 14만명에서 37만명으로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노인 인구 증가에 따라 장기요양기관의 수도 2008년 1700개에서 2021년 5988개로 불었지만, 지역 부동산 가격 상승 등의 이유로 서울을 비롯한 대도심 권역에서는 수요 대비 공급이 부족하다는 분석이다.
특히 서울시 강남구와 서초구는 전국 시군구 중에서 노인 인구가 가장 많지만 인구 대비 장기요양등급 인정자는 상대적으로 적은 지역으로 꼽혔다. 서초구와 강남구의 노인 인구는 각각 26만35명, 24만2576명인 데 반해 장기요양 인정 인구는 3787명(1.46%), 5224명(2.15%)에 불과하다. 요양시설 입소를 요하는 노인 인구는 많은데 시설 수가 부족하다는 반증이다.
이에 문 교수는 요양시설 확충 방안으로 △국공립 시설 확대 △수가 인상을 통한 공급 유도 △민간 기업에 대한 진입 장벽 완화 등을 들었다.
문 교수는 “임대를 허용하면 장기요양시설 운영에 참여하고자 하는 공급자들을 유도할 수 있다”면서도 “일시에 전면적으로 허용하면 시설 난립과 잦은 신규 진입이나 폐쇄로 인한 불안정성이 증가할 수 있다. 공급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전략적이고 점진적인 접근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어 “서울 강남구, 서초구, 강동구, 송파구 등은 노인 인구, 그리고 장기요양등급자 1·2등급 대비 요양시설이 부족한 곳”이라며 “현재 지역별 공급 불균형은 지가로 인한 측면이 강하다. 공급이 부족한 지역부터 임대를 부분적으로 허용하기 시작해 지가에 대한 초기 비용 부담이 줄어들면 공급자 사이에서 서비스 차등화 전략이 나타날 것”이라고 피력했다.
“장기요양보험제도 근간 흔들 것”…돌봄 인력 일자리 불안정 우려도
기존 장기요양기관들은 요양시설 임대 허용이 ‘어불성설’이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요양시설 운영자의 다수는 개인사업자인데, 임대를 열어주면 기존 사업자들이 임대로 전환하거나 대형보험사 등 신규 사업자의 진입과 퇴출이 쉬워져 부실한 시설들이 난립하고 이로 인해 서비스 품질 저하, 관리·감독 혼란 등이 일어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권태엽 한국노인복지중앙회 회장은 “건보공단은 신 노년층의 경제 수준과 지적 수준이 다른 노인 세대와 구별된다며 이들이 대기업, 대형보험사가 제공하는 고가의 서비스를 구매할 여력이 있다고 말하는데, 결코 동조할 수 없다”면서 “임대 운영을 허용하면 요양시설의 갑작스러운 폐업과 민간시설의 난립 등으로 인해 입소 노인들의 피해만 키울 것”이라고 말했다.
박종림 한국노인장기요양기관협회 충북지부장도 “해마다 장기요양기관은 늘어나고 있는데, 베이비부머 세대가 노인 세대로 진입함에 따라 인프라가 부족해질 것을 염려해 보험사에 시설 임대 특혜를 주는 것은 장기요양 정책의 기반을 뒤흔드는 일이다”라며 “이는 서비스 양극화, 상대적 박탈감을 초래해 공적 보험 체계의 근간을 무너뜨릴 것”이라고 주장했다.
사회복지학 전문가도 우려의 뜻을 보였다. 전용호 인천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서울이 전체적으로 요양시설이 부족한 것도 아니고 강남 지역에 한하는 것인데, 지자체와 건보공단이 제대로 관리·감독하지 못하는 현 상황에서 한꺼번에 규제를 풀게 되면 큰 혼란이 발생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전 교수는 “이번 용역 연구는 요양시설 임대를 허용해달라는 손해보험업계의 오랜 요구를 받아들이기 위한 사전 절차로밖에 보이지 않는다”며 “금융자본의 시장 진입을 용의하게 해서 장기요양보험제도의 근간을 뒤흔들 게 만드는 위험한 정책”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소규모 자본으로 신규 시설이 난립하면 기존 요양시설들의 경쟁은 심화되고 재정 상태가 악화되면서 요양보호사를 비롯한 돌봄 인력의 불안정성이 커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요양사업 속도 내는 보험업계…“요람부터 무덤까지 서비스 제공”
손해보험 업계는 요양서비스 산업이라는 새로운 시장을 눈 여겨 보고 있다. 대표적인 보험사는 신한라이프생명보험과 농협생명이다. KB손해보험은 이미 지난 2016년 법적 요건을 갖춰 KB골든라이프케어란 자회사를 세웠으며 서울 송파구와 서초구에서 요양시설인 ‘위례빌리지’, ‘서초빌리지’를 운영하고 있다.
신한라이프생명보험의 경우 요양서비스 사업 진출에 속도를 내고 있다. 지난 2월 신한라이프 자회사형 법인보험 판매 대리점(GA)인 신한금융플러스 안에 관련 사업 부문(라이프케어)을 신설했다. 건물 부지를 선정하고 향후 KB손해보험과 같이 주요 도심에 요양시설을 건립해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계획이다.
농협생명도 요양서비스 사업을 중장기적 신사업으로 설정하고 서비스 전개를 검토하고 있다. 농협생명 관계자는 “서비스 실행 방안을 다각도로 검토하고 있다”며 “현재 검토 시작 단계라 신한라이프생명보험과 KB손해보험처럼 구체적 사업 모델이 도출되진 않았다. 뚜렷한 방향이 나오면 공개하겠다”고 전했다.
보험업계는 보험사가 요양시설을 운영하면 오히려 양질의 서비스가 이뤄질 것으로 보고 있다. 업계 한 관계자는 “고령화 시대에 보험사가 요양시설을 운영함으로써 요람부터 무덤까지 보험 서비스가 제공될 것이라는 기대가 있다”며 “보험사는 요양시설 운영을 통해 이익을 내기보다는 다양한 방식의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는 데 의미를 두고 있다”고 설명했다.
보험사가 요양시설을 운영하는 것에 대해 시민들의 반응은 엇갈렸다. 70대 노모를 집에서 돌보고 있는 김이주(55) 씨는 “요즘 혼자 어머니 돌보는 게 쉽지 않아 요양시설을 알아보고 있다. 대기업이 요양원을 운영하면 시설도, 서비스도 좋을 것 같아 믿고 어머니를 맡길 수 있을 것”이라며 기대감을 보였다.
치매 증상을 겪은 할머니가 과거 요양시설을 이용한 적이 있다고 전한 김성준(44) 씨는 “당시 요양시설에서 신경을 많이 써줘서 할머니가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며 “보험사가 사업을 전개하면 처음엔 서비스가 좋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 업계에서도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나타나 잘 운영하던 곳도 버티지 못하는 사례가 생길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이날 공청회에서는 요양시설 임대 허용을 반대하는 시설 관계자 및 시민단체 등이 참석해 피켓을 들고 항의했다. 이들은 현장에 자리한 정부 관계자에게 정책 추진 철회와 사과를 요구했지만 복지부 측은 “오늘 나온 의견들을 잘 정리하고 반영해 정책 수립 과정에서 검토하도록 하겠다”고 답했다.
신대현 기자 sdh3698@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