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병원에 ‘전공의 사직 처리’ 넘긴 정부…“무책임한 처사”

수련병원에 ‘전공의 사직 처리’ 넘긴 정부…“무책임한 처사”

기사승인 2024-07-11 06:05:01
서울의 한 대학병원에서 의료진이 환자를 옮기고 있다. 사진=곽경근 대기자

수련병원들이 정부에 미복귀 전공의 사직서를 2월29일자로 일괄 수리하는 방안을 건의했지만 정부는 6월4일 사직서 수리 원칙을 고수하며 입장 차를 좁히지 못하고 있다. 수련병원들은 9월 하반기 전공의 모집 인원을 신청하려면 일주일 안에 사직 여부를 파악해야 해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태다.

11일 의료계에 따르면 보건복지부는 수련병원 단체인 대한수련병원협의회가 지난 9일 온라인 회의를 열고 미복귀 전공의 사직서를 2월29일자로 모두 수리하는 방안을 복지부에 제안하기로 했다고 발표한 것을 두고 “사전 교감이 전혀 없었다”고 선을 그었다. 

정부는 전공의 사직서 수리 시점을 두고 줄곧 6월4일 이후여야 한다고 강조해왔다. 지난 8일에도 조규홍 복지부 장관은 “정부가 사직서 수리 금지 명령을 철회한 것이 6월4일이기 때문에 6월3일까지는 명령의 효력이 유지되는 것”이라며 “수련병원이 정부의 사직서 수리 금지 명령에 반해 사직서를 소급해 수리할 수 없는 것이 원칙이다”라고 밝혔다.

복지부는 미복귀 전공의들이 병원에 돌아올 수 있도록 사직 후 1년 내 재지원 제한 완화, 모집 과목 제한 완화 등 ‘수련 특례’를 적용하고, 오는 9월 하반기 모집에 지원할 수 있도록 했다. 단 수련 특례는 이번 하반기 모집에만 적용된다. 통상 신규 전공의는 3월, 정원 미달에 따른 추가 전공의는 9월 모집한다.

전공의들은 사직서를 제출했던 2월29일을 기준으로 사직 수리가 적용돼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6월4일을 기준으로 사직서가 수리될 경우 그간 업무개시명령 불응으로 인한 법적 책임, 퇴직금 미지급 등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다. 또 수련교육지침상 사직할 경우 1년 이내에 동일 연차, 동일 과목으로 복귀할 수 없다. 이 때문에 내년 3월에 복귀하기 위한 포석으로 2월29일 사직서가 수리돼야 한다고 밀어붙인다는 분석도 있다.

8일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은 의사 집단행동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브리핑을 통해 미복귀 전공의 1만여명에 대해 면허정지 등 행정처분을 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발표했다. 사진=곽경근 대기자

그러나 정부는 6월4일자 사직서 수리를 고수하고 있다. 복지부 관계자는 “6월4일부터 사직서 수리 금지명령을 철회했으므로 6월3일까지는 명령의 효력이 유지되고, 사직 효력은 원칙적으로 6월4일 이후 발생한다”며 “이에 따라 수련 규정과 관련된 공법상 효력도 6월4일 이후 발생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수련 특례를 적용하지 않아도 2월29일자 사직서를 수리하면 내년 3월에 복귀할 수 있다는 의견에 대해선 “복귀 시점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고 일축했다.

다만 정부는 사직서 처리 기한을 15일에서 22일로 연장하는 방안을 검토할 방침이다. 정부는 오는 15일까지 결원을 확정해야 22∼31일 추가 모집을 거쳐 9월부터 전공의들이 의료현장에서 일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정부가 내놓은 대책에 수련병원들은 혼란에 빠졌다. 사직서 수리 시점을 아직 결정하지도 않은 마당에 수련환경평가위원회로 하반기 전공의 모집 인원을 신청하라고 제시한 ‘데드라인’이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는 오는 17일까지 수련병원들이 기한을 지켜 조치하지 않을 경우 내년도 전공의 정원을 감원하겠다고 경고한 바 있다.

“전공의 수련 특례, 지역 의료공백 키울 수도”

미복귀 전공의를 일괄 사직 처리하더라도 결원이 채워질지 장담할 수 없는 상황도 사직서 수리를 망설이게 하는 요인이다. 일각에선 정부 방침대로 어느 병원이든 옮겨서 수련을 받을 수 있게 되면 전공의들이 수도권 대형병원으로 몰려 지역 의료공백이 더 커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대한의학회는 9일 보도자료를 내고 “일부 전공의가 돌아오는 상황을 기대할 수 있겠지만, 의료 정상화를 위해 바람직한 상황은 아니다”라며 “지방 전공의나 소위 비인기과 전공의가 서울의 대형병원 또는 인기과로 이동 지원하는 일들이 생길 수 있고, 지방·필수의료의 파탄은 오히려 가속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선발이라는 것은 공정성을 담보로 해야 하는데, 졸속으로 처리하다 보면 또 다른 문제가 야기될 수 있다”며 “정부는 현장의 목소리를 반영해 전공의들이 의료현장에 복귀할 수 있도록 실효성 있는 정책을 수립해 주길 바란다”고 요청했다.

서울의 한 대학병원에서 의료진들이 이동하고 있다. 사진=박효상 기자

의료계는 전공의들이 복귀도 하지 않고 연락도 되지 않는 상황에서 정부가 문제를 일으켜놓고 수련병원들이 결정하라며 책임을 떠넘기는 태도에 “무책임한 처사”라며 들끓고 있다. 박은철 연세의대 예방의학교실 교수는 쿠키뉴스와의 통화에서 “수련병원에 공이 넘어간 상태에서 수련병원들이 하자는 대로 해주면 될 일을 정부가 왜 6월4일 사직을 고집하는지 이해가 잘 안 간다”고 비판했다. 이어 “이번 조치로 필수의료에 대한 기대감을 잃은 지방 수련병원 전공의들이 서울 대형병원 비필수과에 몰리면 지방의료는 지금보다 더 어려워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9월 하반기 모집에 수련 특례가 적용되더라도 전공의 복귀는 극소수에 그칠 것이라는 시각이 적지 않다. 고대안암병원장을 지낸 박종훈 고려의대 정형외과 교수는 “정부가 의대 정원 증원 빼고 다 양보하고 내줄 수 있는 건 다 내줬지만 전공의는 돌아오지 않는다”며 “전공의들을 많이 만나봤지만 현 상황에 대해 굉장히 냉소적인 반응이다. 복귀의 길은 이미 물 건너갔다”고 짚었다.

대한내과학회 수련이사를 맡고 있는 김대중 아주대병원 내분비대사내과 교수는 “이대로 전공의들이 복귀하지 않고, 병원 운영도 정상화되지 않으면 정부는 그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면서 지금이라도 정부가 잘못을 인정하고 고개를 숙여야 한다고 했다. 김 교수는 “정부가 9월에 복귀하지 않으면 내년 3월에는 기회가 없다는 식으로 전공의와 수련병원을 다그치고 강압적으로 나오는 탓에 상황이 더 꼬여버렸다”며 “내년 3월부터 수련을 이어갈 수 있도록 조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신대현 기자 sdh3698@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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