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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키 문화] 부산이 낳은 박광택(51)화백은 청각장애를 빼놓고 설명할 수 없다.
그는 장애에 굴하지 않고 그림을 그려온 결과 한국화의 새로운 경지를 대중들에게 선보일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의 작품은 지리산 정상에서 때묻지 않은 눈으로 바라보는 자연을 기저로 하고 있다.
지난해 11월 26일부터 12월 2일까지 펼쳐진 월간 미술세계 창간 24주년 코아스 전시회에 부산 대표작가로 나와 6점의 작품을 판매할 정도로 대중적인 인지도가 높아가고 있다. 해외여행 등을 통해 경험한 고고학적 지식이 작품에 고스란히 녹아 있어 외국인들에게도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박 화백은 스스로를 오리처럼 사는 사람이라고 자처한다. 육지에서는 호랑이와 사자가 강하지만 물 속에 들어가지 못하고, 하늘에서는 강한 독수리가 물 속에 들어가지 못하고, 바다왕자인 고래도 육지에는 나오지 못하는데 오리는 전부 가능하기 때문이다.
박화백은 ‘나의 사전에는 불가능이란 없다’라는 나폴레옹의 말을 좌우명으로 살아가고 있다. 겉보기엔 약한 오리 같지만 어느 곳에서도 살아갈 수 있는 오리처럼, 자신의 장애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게 작가의 길을 걸어왔다.
◇작가의 길을 열어준 두 사람=박 화백이 그림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 동기는 부산농아학교(현재 부산배화학교) 초등부 5학년 때 서울에서 부임해 온 이재진 교사(후일 경성대 교수로 정년퇴임)가 그림솜씨를 인정해 주고 용기를 불어넣어준데서 비롯됐다. 당시 박 화백의 어머니가 학교 벽에 걸린 헬렌켈러의 초상화를 보며 희망을 갖고 그림공부를 적극적으로 뒷바라지해준 것도 큰 힘이 됐다.
박 화백은 “우리나라의 특수교육은 지금도 별로 달라진 것은 없다”면서 “당시에도 중학부에선 장애인 특수교육과정에 기술교육을 받도록 되어 있었다”고 회고했다.
그런 그를 일으켜 세운 것은 미술지도 교사와 어머니였다. 두사람의 간절한 소망이 학교측에 받아 들여져 그 시간에 미술실에서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는 것이다. 점심시간에도 밖에 나가지 못하게 하며 그림 공부를 시킨 미술교사 덕분에 미술대회에서 최고상, 최우수상을 수차례 받았다.
박 화백은 “일반학생들과 함께 겨루면서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교육은 삼박자가 맞아야 한다. 장애인의 특수교육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교사가 아무리 열심히 지도하려 해도 학생이 따라 주지 않거나 부모가 교육에 무관심해도 올바른 교육이 어렵다. 학생과 부모는 적극적인 지도를 바라더라도 열정적인 교사가 없다면 그 아이의 장래는 좌절될 수 밖에 없다.
박 화백은 삼박자를 모두 갖춰 중학부를 졸업할 때쯤엔 우연한 기회에 대통령의 배려로 대학의 청강생으로 들어가 청각장애인의 이야기를 듣고 대학에 갈 수 있다는 꿈도 갖게 됐다.
박 화백은 중학부를 졸업하고 자신을 작가의 길로 이끌어 준 미술교사의 적극적인 권유로 국립서울농아학교에 진학했다. 박 화백은 서울공부를 뒷바라지한 부모의 은혜에 조금이라도 보답하기위해 공부와 그림공부에만 전념했다.
◇운보 김기창과의 만남=박 화백은 서울로 진학한 첫째 목적이 훌륭한 스승에게 그림공부를 사사하는 일이었다고 언급했다.
박 화백은 “운보 김기창 화백과의 첫 만남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며 “그 분의 자택에 처음 찾아갔을 때 선생님은 그림에 열중해 계셨으나
우리 모자를 보시자 자리를 권하신 후에 인자하고 여유롭게 필담으로 대화를 이끌어 가셨다. 나는 긴장했던 마음이 풀어지고 곧 편안한 마음으로 지도 받기를 간청할 수 있었다. 운보 선생님의 소개로 심당 유남식 화백에게는 동물화를, 세종대학교에 계시던 운정 정완섭 화백에게는 풍경화를 고등부를 졸업할 때까지 지도 받았다”고 회고했다.
박 화백은 “고교시절에 작품의 평가를 받기 위해 안국동에 있는 운보선생님의 화실에 갔을 때 마침 화랑주인이 있었는데 운보선생님께 작품에 대해 지도를 받고 나오는 나에게 화랑주인이 조선시대의 작품을 보여주며 똑같이 그려주면 좋겠다고 부탁하는 것을 나는 단호히 거절했다. 운보 선생님께선 표절한 작품을 판매하면 안 된다고 하셨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지금은 3명 모두 고인이 되었다. 박 화백은 3명의 스승을 참 자상하고 친절한 분들이었다고 소개했다. 그는 고등부 3년 동안 대학생을 위한 백양회 공모전에서 3회 입선을 하고 중앙일보사 학생미술대회에서 대상을 받아 주위의 인정을 받았다.
◇청각장애인 화가, 석사 2개 따다 =박 화백은 “학교 기숙사가 있었지만 부모님의 반대로 하숙을 하고 있던 고교 2학년 봄이었다. 밤 12시쯤 되어 공부를 마치고 잠을 자려하다 창문 밖을 바라보니 대학 입시생이 있는 옆집의 창문에 아직 불빛이 켜져 있지 않은가! 그 때 나의 머리에 떠오른 것은 부모님께서 하신 ‘항상 사회경쟁에 뒤떨어지지 않도록 하려면 남보다 몇 배 더 노력해야 한다’ 는 말씀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후 옆집 창문 불빛이 꺼질 때까지 계속 공부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학창 시절 중에 제일 고마운 것은 바로 옆집 학생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또 중국 고전을 읽었던 것 중에서 ‘성년은 다시 오지 않고 하루에 새벽은 다시없으니 때를 따라 열심히 공부하여라. 세월은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 라고 한 도연명의 시에 매우 깊은 감명을 받았다.
박 화백은 1978년 고등부를 수석으로 졸업한뒤의 꿈은 대학에 진학하는 것으로 굳혔다. 그러나 장애인의 대학입학을 거의 허용해 주지 않았던 당시의 시대 상황에선 청각장애인인 내가 대학에 진학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더욱이 일반고등학교의 교육과정과 비교해 볼 때 취업을 위한 기술교육을 중심으로 하는 청각장애학교에서 배운 내용으로 대학예비고사에 합격하기엔 너무도 성적이 형편없었다. 하지만 그는 대학 진학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박 화백은 “개인지도를 받으면서 대학입학준비를 시작했다. 나는 물론 개인지도 선생님의 고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16개 과목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으며 말로서 듣고 배워야 할 것을 모두 글로 써주면 노트에 적힌 글을 보고 이해하고 배우느라 방 한쪽에는 노트가 쌓여갔다. 잠자는 몇 시간외엔 계속 의자에 앉아 지냈기 때문에 나중엔 엉덩이가 곪아 앉을 수가 없어 엎드려서 공부를 하여야 했다”고 고통스러웠던 당시의 상황을 설명했다.
그는 청각장애학교 출신자중 예비고사 사상 첫 합격이라는 기적을 이룬 인물이다. 그럼에도 청각장애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대학수학능력이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어느 대학에서도 그에게 대학입학의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런 절망속에 그를 아끼는 사람들의 집념어린 설득과 노력으로 동아대의 승인을 얻어 마침내 시험을 치러 대학본고사에 당당히 합격했다. 청각장애인이 4년제 대학교에 가는 것을 불가능이라고 여기던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이 사건은 청각장애인에 대한 인식을 달리하게된 계기가 됐다.
대학입학후에도 대학생활은 결코 화려하고 쉬운 일은 아니었다. 듣지 못하는 강의시간! 교수들의 강의를 알지 듣지 못했다. 친구들은 지금 왜 웃고 있는지도 몰랐다.
박 화백은 “옆에 앉은 친구의 강의노트를 옮겨 적으며 혼자 이해해야 했고, 부족한 공부를 보충하기 위해 대학교재를 노트에 옮겨 적어 가며 공부해 나갔다. 남모르는 어려움 속에서 피나는 노력을 하며 학점을 따낸, 힘들었던 교양과정을 마치고 전공에 들어가서는 작품에 몰두해 열심히 그림을 그렸다”고 대학생활을 회고했다.
박 화백은 3학년부터 장학생으로 선발돼 대학에서 교직과목을 이수해 대학을 졸업할 때에는 중등학교 2급 미술정교사자격증을 받았다. 하지만 학교교사로서의 길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특수학교 교사는 특수교사자격증을 소지한 자만 갈 수 있다는 규정에 의해 미술교사 자격증을 가졌지만 청각장애로 인해 일반학교에도 갈 수도 없고, 특수교사자격증이 없어 농학교에도 갈 수가 없는 상황에 직면한 것이다.
박 화백은 특수교사 자격증이 없어 청각장애학교 교사로 올 수 없으니, 대구대학교 대학원 특수교육과에 진학해 졸업하면 길이 열릴 것이라는 주변의 권유로 경희대 대학원 미술과 진학을 포기하고 대구대 대학원 특수교육과에 응시해 합격했다.
박 화백은 “대학원 수업을 준비하던 나는 강의중심의 교육학 수업을 어떻게 받아야 할지 걱정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대구대교수님들은 장애인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 나는 따뜻한 배려와 격려 속에서 공부했다. 대학생활보다 대학원의 공부는 정말 배움의 기쁨과 즐거움을 느끼게 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박 화백은 대학원에 공부하러 다닌 지 2년 반만에 5학기를 마쳤다. ‘농학교 초등부 아동의 회화 표현 유형 분석’이라는 제목의 논문이 심사에서 통과돼 석사모를 썼다. 특수교사자격증도 취득했다. 교사 임용고시에 응시해 1차 교직·전공시험, 2차 논술시험, 3차 면접시험에 모두 합격해 현재 근무중인 공립 부산 배화 학교로 배치된 것이다.
박 화백은 “특수교육을 공부하던 동안은 그림공부를 접어 두었다. 그러나 나는 그림을 통해서만 자아를 찾아 갈 수 있는 길임을 깊이 느끼고 있다. 그래서 대학 졸업 후 틈틈이 혼자서 작품을 하며 나의 작품 세계를 여러 가지로 넓혀나가려고 시도해 보았으나 우물 안 개구리 같은 답답함을
풀 길이 없었다. 그래서 다시 홍익대학교 대학원에 응시하여 합격하였다. 학교교사로 근무하면서 서울로 공부하러 다니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나의 꿈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최선을 다하였다”고 말했다.
◇화가, 그리고 청각 장애=박 화백은 “청각장애를 딛고 일어서서 오늘의 자리에 오기까지는 가족들의 따뜻한 사랑과 헌신적인 뒷바라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말 못하는 손자의 손을 잡고 송도까지의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등하교 시켜 주신 할아버지, 자식의 공부를 위해 서울까지 보내 주신 부모님, 모두가 나를 사랑으로 도와준 고마운 사람들”이라고 강조했다.
박 화백에게도 제자가 적지 않다. 대학을 졸업하고 미술학원을 할 때 지도한 학생들 중 김영미(대구대 대학원 특수교육전공·대구영화학교 교사), 박태웅(동의대 산업미술과 졸업 후 컴퓨터 관련 중소기업 근무), 신영숙(단국대 특수교육전공·경남 천광학교 교사), 김진경(미국 갈로렛대학 졸업 후 미국 회사 근무)등이 그들이다.
‘제2의 운보’로 알려진 그의 작품은 4월 장애인의 달을 맞아 다음달 20일부터 5월 1일까지 여의도 국민일보빌딩 지하 1층 국민갤러리에서 열린다(박광택의 마음으로 보는 세상 블로그 : http://blog.naver.com/pktaek789). 박광택, 동아대학교 문리대학 회화과 졸업, 대구대학교 대학원 특수교육학과 졸업, 홍익대학교 대학원 동양화과 졸업, 현재 부산배화학교 교사, 작가활동 국민일보 쿠키뉴스 정창교 기자 ?cgy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