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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키 사회] 21일 서울 신촌동 연세대 세브란스 병원 9층 중환자실은 환자들의 생명을 연장하고 있는 기계 소리만 울려퍼졌다. 대법원이 식물인간 상태에 빠진 김모(77·여)씨의 산소호흡기를 제거하라는 판결을 내린 날이었다.
◇가족, “호흡기 제거 빨리 해달라”=의사와 간호사들만 드나드는 중환자실 문틈으로 보이는 김씨는 헝크러진 머리카락에 무표정한 얼굴로 욕창 방지용 공기 침대에 누워 있었다. 김씨의 가슴은 숨을 쉬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만큼 오르락 내리락 했다. 병원 관계자는 “김 할머니는 현재 살을 꼬집으면 미세한 움직임을 보이는 상태”라고 귀띔했다.
김씨 가족들은 대법원의 판결 소식에 연명장치인 호흡기를 즉시 제거해 줄 것을 요구했다. 가족들은 병원에 모습을 보이지 않은 채 소송을 대리한 신현호 변호사를 통해 보도자료를 냈다. 이들은 “병원이 연명치료를 중단해 주지 않아 할머니와 우리가 오랫동안 고통받은 것이 유감스럽다”면서 “이번 판결은 사회적 강자의 일방적 횡포에 대한 일침이자 인간 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이 사회 구성원들의 바램”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할머니의 생전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데 강한 미련이 남는다”며 슬픈 마음을 표현했다.
◇병원, “엄격한 기준 따라 연명 중단하겠다”…가이드라인도 제시=세브란스 병원은 존엄사를 처음으로 인정한 판결이라는 데 의미를 둔다면서도 착잡한 심정을 내비쳤다. 박창일 연세의료원장은 오후 4시 기자회견을 열고 “평안하고도 존엄한 죽음은 누구나 소망하는 일이지만 한번 거둬진 생명은 다시는 회복할 수 없다는 점에서 존엄사는 매우 신중하고도 엄격하게 적용돼야 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박 원장은 “존엄사에 대한 세브란스병원의 기준에 따라 보다 명확하고 엄격하게 적용해 연명치료 중단을 시행하겠다”고 강조했다. 그는 회복 가능성이 있는 식물인간조차 존엄사 요구가 일고 있는 현실에 안타까움을 표시하면서도 가족들에게 심심한 위로를 전했다.
병원 측은 대법원의 최종 판단이 나온 만큼 생명연장 장치를 제거하는 조치는 판결 내용에 의거해 진행하겠다는 입장이다. 김씨의 연명치료 중단은 판결문을 송달받은 뒤 가족과 병원 윤리위원회 등의 의견을 모아 이뤄지게 된다.
세브란스병원은 국내 최초로 존엄사 가이드라인도 마련했다. 이 가이드라인은 뇌사 환자나 여러 장기가 손상된 환자 등 죽음이 임박한 상태의 환자를 1단계, 식물인간 상태로 인공호흡기에 의존해 살아가고 있는 환자를 2단계, 식물인간 상태지만 호흡이 스스로 가능한 환자를 3단계로 구분하고 있다.
◇시민단체, “치료 주권 환자로 이동, 법제화 서둘러야”=의료계와 시민단체 등은 대체로 환영의 뜻을 나타냈다. 한국의료법학회는 “이번 판결은 치료 주권이라는 권력이 의사로부터 환자로 이동한 것”이라며 “앞으로 존엄사와 관련된 다양한 판례를 축적해 우리 풍토에 맞는 요건과 기준을 만들어야 한다”고 긍정적 입장을 밝혔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은 “소모적인 논쟁과 반대를 위한 반대를 중단하고 구체적인 기준과 방식 등 실질적인 논의가 이뤄져야 한다”며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거부할 수 있는 환자의 권리 보장을 위해 존엄사 법제화를 서둘러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김아진 권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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