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 사회] 대법원이 처음으로 존엄사를 인정한 것은 생명이 소중하다는 이유로 환자가 거부하는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강요하는 것은 환자의 기본권을 침해한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이번 판결로 존엄사 합법화의 길은 열렸지만 제도적 법적 뒷받침 등은 우리 사회의 숙제로 남게됐다.
◇생명권 위해 자기결정권 침해해선 안돼=대법원은 생명권 존중이라는 헌법적 이념은 소중하지만 헌법에 보장된 환자 개인의 존엄과 가치, 행복추구권과 자기결정권을 침해해서는 안된다고 밝혔다. 진료를 받는 것은 의료계약에 따른 행위이고 환자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자유롭게 계약을 해지할 수 있고 진료행위의 변경도 요구할 수 있다. 이를 환자의 생명과 직결되는 진료행위에 적용할 때는 매우 신중해야 하지만 회복 불가능한 사망단계에 접어든 경우 진료를 거부할 수 있는 권리가 존중돼야 한다는 게 대법원의 판단이다.
대법원은 특히 회복불가능한 사망단계에 진입한 경우 더 이상 인격체로서 활동을 기대할 수 없는 데다 연명치료도 무의미한 신체침해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환자가 거부하는 데도 연명치료를 강요하는 것은 삶의 마지막 단계에 이른 환자의 존엄과 가치를 훼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존엄사 길 열려=대법원 확정 판결로 우리나라에서도 회복 불가능한 사망 단계에 들어선 환자가 자신의 의사에 따라 연명치료를 중단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됐다. 존엄사가 허용되면 회생 가능성이 없는데도 인공생명 유지장치에 의지한 채 기약없는 세월을 보내야 했던 환자 본인과 가족들의 정신적 육체적 경제적 고통은 상당히 줄어들 수 있다. 무의미한 연명치료에 들어가는 사회적 비용도 줄어들고, 여기에 투입돼 온 의료역량을 회생가능한 환자들에게 돌림으로써 의료서비스가 향상될 것이라는 기대도 나오고 있다. 반면 생명경시 풍조가 조장될 수 있다는 우려도 적지 않다. 마치 개인에게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있는 것처럼 비쳐질 경우 자살을 정당화할 수 있고 난치·불치병 환자들의 치료에 부정적인 태도가 늘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넘어야 할 산 많아=길은 열렸지만 당분간은 혼선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대법원은 최소한의 기준만 내놓았을 뿐 구체적인 절차나 판단근거 등을 제시하지는 않았다. 전문의로 구성된 위원회에서 다뤄야 한다는 정도의 의견만 냈을 뿐이다. 따라서 환자 본인의 치료거부 의사를 추정할 때 누가 어떻게 판단할 것인지, 환자 가족이나 지인들의 증언이 엇갈릴 경우 어떻게 할 것인지 등의 문제는 공백상태로 남아있다.
현행법과 마찰을 빚고 있는 점도 해결이 필요하다. 현행법으로는 "집에서 편안하게 생을 마감하게 해달라"는 환자의 요청을 의사가 받아들일 경우 촉탁살인죄나 자살방조죄로 처벌될 수 있다. 전문가들은 존엄사 문제를 둘러싼 혼란과 부작용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관련 법 개정과 입법이 시급하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송세영 양지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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