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미화와 폄하를 넘어서

노무현,미화와 폄하를 넘어서

기사승인 2009-05-30 22:34:11

[쿠키 정치] 1992년 12월19일 김대중 민주당 대통령 후보는 전날 대선에서의 패배를 수용하고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다음날 신문은 일제히 이 소식을 비중있게 다루면서 김 후보를 치켜세우기 바빴다. 언론들은 김 후보에게 ‘민주화 투쟁의 거목’‘불굴의 투사’ 등 온갖 미사여구를 붙이기에 급급했다.하지만 불과 대선직전까지만 해도 김 후보에게 따라다니는 꼬리표는 ‘권모술수의 대가’‘지역주의의 화신’‘이념적으로 불안한 선동가’ 등 부정적 표현 일색이었다. 당시 김대중 후보는 “언론의 갑작스런 찬양 위주의 보도에 당황스러웠다”고 말했다. 순식간에 바뀌는 언론의 화려한 변신을 개인적으로 처음 목도한 순간이다.

그로부터 17년이 지난 2009년 5월. 극과 극을 오가는 언론논조의 변신을 다시 지켜보게된다. 아니 그 강도는 17년전보다 한술 더 떠 보인다.

올들어 5월 23일 이전까지 이 남자는 언론에서 ‘자신의 후원자로부터 600만 달러 이상의 돈을 자신 혹은 아내가 받은’ 뇌물수수혐의로 검찰 조사까지 받는 범법자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다. 또 자신의 혐의를 부인하며 아내에게 책임을 미루는 졸장부로 낙인 찍혔다. 그의 모든 발언은 치졸한 변명으로만 치부됐다.

게다가 아내는 1억원짜리 시계 2개를 논두렁에 버렸고 딸은 미국 호화주택 구입계약서를 찢는 등 증거인멸을 시도한 것으로 언론에 소개됐다. 언론에 따르면 이보다 더한 콩가루 집안이 있을까 싶을 정도다. 지난해 초 그가 권좌에서 내려오기 전에는 아마추어적 국정 운영에 서민경제 파탄의 원흉으로 지목되기도 했다.

하지만 5월23일부터 그에 대한 언론의 평가는 180도 달라졌다. 그는 지금까지 어떤 위정자보다 서민적이었고 지역주의와 권위주의에 정면으로 맞선 의인으로 묘사됐다. 바로 지난 23일 서거한 노무현 전 대통령 이야기다.

무려 500만명 이상이 노 전 대통령을 추모하는 범국민적 열기를 이끈 데에는 언론의 역할이 컸다. 24시간 내내 국민을 너무나도 사랑하고 섬기는 그의 모습을 틀어주는 방송을 보고 있노라면 정말이지 조문 하지 않으면 지각없는 사람으로 찍힐 것 같은 느낌을 받게 했다.

물론 돌아가신 분, 특히 전직 대통령에 대한 추도 분위기를 조성하는 언론의 역할을 모르는바 아니다. 그러나 생존시와 사후의 평가가 이처럼 확연히 다르면 언론은 신뢰를 잃게 된다.

소파에 자는 모습이 소박함의 상징이고 집무실의 컴퓨터를 응시하는 것이 일에 진지한 자세라는 방송 나레이터의 발언에 이르러서는 말문이 막힌다. 그의 소박함은 생존에는 가볍고 경망스럽다는 평으로 통용됐고 진지함은 고집스러움으로 묘사됐다. 격세지감이란 말은 이럴때나 쓰는 것 같다.

노 폄하에서 노비어천가로 언론논조가 급변한 데 대해 주변의 눈길은 곱지 않다.

최상재 전국언론노조 위원장은 최근 모 라디오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불과 하루 이틀 전만 하더라도 노 전 대통령을 거의 정치적 파산자로 몰아붙이고 가족들까지 인간적 모멸을 주던 언론사들이 하루아침에 태도를 바꿔 그런 보도를 한 일이 없는 것처럼 주장하는 것은 전형적인 하이에나식 보도”라고 비판했다.

뉴욕타임즈와 인터뷰한 한 회사원은 “그의 자살과 함께 국내 언론의 보도가 너무 빨리 바뀌는 것을 보고 혼란스러웠다”면서 “매국노처럼 취급하다가 하룻밤새 숭배의 대상이 됐다”고 꼬집었다.

이에 따라 지나치게 이념적·정파적 잣대로 위정자를 평가하는 언론의 풍토를 바꿔야한다는 지적이 많다. 공과에 대한 시시비비를 가리기 보다 극단적인 비난과 지지로 갈리는 현재의 보도태도가 계속될 경우 서거와 같은 특수한 상황이 오면 또다시 롤러코스트를 방불케하는 논조의 혼란을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지금이라도 노 전 대통령에 대한 냉정하고 치밀한 평가가 진행돼야한다. 생전에 보수언론이 주도했던 지나치게 폄하적인 잣대는 물론이고 서거 이후의 분위기에 편승한 숭배적인 관점도 지양돼야한다.

민주주의의 지평을 확대하고 경제 체질을 튼튼히 했고 국민의 정부이후 지속된 남북화해기조를 다진 점은 어떤 정파라도 인정하고 계승해야할 부분이다. 권위주의의 권력지형도를 바꿔 청와대와 국민의 거리를 좁힌 점도 평가받아야 한다.

반면, 도덕적 우월감으로 상대방을 몰아붙이거나 무시하면서 사회분열의 단초를 제기한 것은 어찌됐든 정치력의 미숙함을 보여준 사례다. 회전문 인사로 대변되는 권력나눠먹기, 상당수 지지자들의 등을 돌리게한 부동산 가격폭등 등 일부 정책의 실패도 현재의 정치세력이 반면교사로 삼아야한다.

그래야 포스트 노무현 시대에 우리가 지향해야할 바가 명확해진다. 문제는 현 정부가 참여정부로부터 계승할 것은 외면한 채 버려야 할 것은 악착같이 따라한다는 점이다. 29일 노 전 대통령의 영결식과 노제 장소에서 뿜어나온 현 정부에 대한 비판은 이같은 시행착오에 대한 원망과 답답함도 깊게 깔려 있다. 온고지신(溫故知新)은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이 간직해야할 가치라는 점을 현 정부는 잊어선 안된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고세욱 기자
swkoh@kmib.co.kr
고세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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