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때 사학자 김성칠이 본 ‘단장의 미아리고개’

6·25때 사학자 김성칠이 본 ‘단장의 미아리고개’

기사승인 2009-06-24 20:22:00


[쿠키 문화] 서울 미아리고개는 6·25의 비극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상징적 장소다. 이 고개가 인민군 수중에 들어감으로써 동족상잔의 비극이 본격화됐고, 남한의 지식인과 관료 등이 포박당해 이 고개를 넘으면서 분단의 불길한 전조가 드리워졌다.

사학자 김성칠(1913∼1951)서울대 교수는 6·25를 전후로 소위 '단장의 미아리고개'로 불리는 이 고개 인근에 살며 동포끼리 싸우는 비극을 일기로 남겼다. 김 교수는 1·4후퇴까지 집인 정릉리 손가장마을과 학교인 동숭동 문리대를 지키며 중도파 지식인으로서 고뇌하며 깊은 한숨을 쉰다. 25일 '역사 앞에서'라는 책으로 출간된 그의 기록은 당시 지식사회에 번진 극한의 좌·우 대립 등이 좌·우파 논쟁에 휩싸인 오늘을 경고하고 있는 듯하다. 김 교수의 일기를 바탕으로 1950년 유월의 미아리고개를 재구성해 보았다.




지난 22일 사학자 김성칠(1913∼1951)의 저서 '역사 앞에서'(창비)가 16년 만에 개정·증보판으로 출간됐다. 그는 6·25를 전후로 소위 '단장의 미아리고개'로 불리는 서울 미아리고개 인근에 살며 동포끼리 싸우는 비극을 일기로 기록했다.

김성칠은 1·4후퇴까지 집인 정릉리 손가장마을과 학교인 동숭동 서울대 문리대를 떠나지 못하고 국군과 인민군 치하에서 중도파 지식인으로서 고뇌하며 깊은 한숨을 쉰다. 지식사회에 번진 극한의 좌·우 대립 등이 좌·우파 논쟁에 휩싸인 오늘을 경고 하고 있는 듯하다. 김성칠 일기를 바탕으로 1950년 유월의 미아리고개를 재구성해 보았다.

“1950년 6월25일. 낮때쯤 하여 밭에 나갔더니 가겟집 주인 강군이 시내에 들어갔다 나오는 길이라면서 아침 38전선에 걸쳐서 이북군이 침공해와서 지금 격전 중이고 그 때문에 시내엔 군인의 비상 소집이 있고 거리가 매우 긴장해 있다는 뉴스를 전하여주었다.”

이날 김성칠은 한국전쟁 발발 소식을 이렇게 들었다. 집과 학교를 오가며 강의와 연구에 매진하던 한 사학자가 역사의 질곡에 빠져드는 순간이다. 그는 전쟁의 와중에도 일기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가 살던 정릉 손가장마을은 북한산 자락이었고 그 자락을 따라 내려가면 미아리고개와 아리랑고개가 서울의 경계로 인식되던 때였다.

따라서 집과 학교를 오가자면 두 고개를 포함해 돈암전차역, 삼선교, 혜화동 등이 생활권역에 속했다. 한데 그해 유월 대한민국 사수의 마지노선이라고 할 수 있는 미아리고개가 인민군에 접수된다. 김성칠은 T34 소련제 탱크가 험준한 미아리고개를 넘어오는 장면을 똑똑히 목격한다.

“이윽고 날이 밝아오자 포성이 뜸해지기에 밖을 내다보니 낙산 위에 늘어섰던 포좌가 간 곳이 없고 멀리 미아리고개로 자동차보다 크고 육중해 보이는 것이 이곳을 향하여 천천히 내려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저것이 대포알을 맞아도 움쩍하지 않는다는 이북의 탱크가 아닌가 싶다”(28일 일기)

그는 북한을 “자신들이 주동이 되어 통일하지 않으면 미제의 밥이 되고 말 것 같아 몹시 초조하였을 것”이라며 “정세판단을 그르치고 경거망동을 함부로 하여 동포를 어육내고 조국을 초토화하고 있다”(9월1일)고 썼다. 그러나 그도 나약한 인간인지라 발발 직후 “나 자신은 어떻게 될 것인가” 고민하고 “손바닥만 한 38 이남에 안전한 곳이 있을 것인가”하고 한탄한다. 식솔 넷을 거느린 서른여덟의 가장이었던 것이다.

6월27일 정부는 대통령이 피란길에 올랐고, 국무총리 신성모가 ‘정부가 수원으로 옮겼다’고 발표했다가 이를 부정하고 나중엔 ‘해주점령’을 보도하자 “나라고 개인이고 간에 일시의 편익을 위하여 허위의 길을 밟는 것은 자멸의 길”이라고 충고한다.

정부의 서울 사수는 27일 밤 지금의 북악스카이웨이와 대학로 뒷편 낙산을 중심으로 저지선을 구축하며 힘겹게 싸우나 다음날 새벽 “낙산 위에 늘어섰던 포좌가 간 곳이 없다”며 인공치하가 됐음을 알린다. “학교 깃대엔 말로만 듣던 인공국기가 나부끼고…언제부터 우리 사이에 풀지 못할 원수가 맺히어 총검을 들고…땅을 치고 통곡하고 싶은 심정…그러나 나는 울래야 울 수 없는 인민공화국 백성이 되어 있는 게 아니냐”고 적었다.

29일 마을 자치대는 식량을 요구하고, 서대문형무소를 출감한 좌익 친구가 찾아오고 다음날에는 서울대 문리대에 좌익 자치위원회가 꾸려진다. 7월1일에는 인민군이 학교를 접수하며 2일에는 동네 반장이 완장을 차고 동장으로 나서고, 술꾼 장씨가 반장 완장을 이어 찬다.

이름 석자면 고개를 끄덕일 만한 지식인의 변절과 서로 간의 내부 고발, 자신이 겪는 교수직 파면, 전향 강요, 굶주림, 토굴 생활 등이 집과 학교 사이에서 펼쳐진다.

그리고 9월23일 일기에 “밤이면 미아리고개를 넘어서 자동차와 화물자동차가 쉴 새 없이 북으로 향하고…상당한 신분과 지위를 가진 사람들이 꼬지 꿰듯 줄에 엮어서 강행군을 시키고”로 인민군 퇴각을 알린다. 노래 ‘단장의 미아리고개’이다.

한데 9·28 서울수복 후 군과 미군은 인민군과 별반 차이 없이 국민을 대하고, 무고한 사람을 좌익으로 몰아가 “이 땅의 백성질하기 참으로 어려운 일”이라고 묘사된다.
일기는 “10월2일 처음 종로에 나가니 종각이 흔적 없고, 중앙청과 육조 거리가 잿더미로 화했고, 광화문과 남대문은 허물어졌다”며 끝나지 않은 전쟁의 참상을 전하고 있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전정희 기자
jhje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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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정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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