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 사회] 1944년 봄 국민학교를 갓 졸업한 이재진(당시 13세)군은 생전 처음으로 배를 탔다. 며칠 전 찾아 온 면사무소 직원이 일본에 가면 돈을 많이 벌 수 있고 또래 동무도 많다고 했다. 후쿠오카현의 한 산골. 산허리마다 크고 시커먼 구멍이 뚫려 있었다. 곳곳엔 가슴 높이 만한 삽과 곡괭이가 널부러지거나 땅에 꽂혀 있었다.
전쟁이 한창인 43∼44년 일본은 10대 초반의 소년들까지 무차별적으로 징용하기 시작했다. 일본 내 탄광촌에서 일하던 조선인 징용자들이 잇따라 죽거나 이탈하면서 일손이 달리던 시기였다. 특히 석탄 수요가 치솟았지만 캐낼 사람은 절반 이상 줄었다. 일본은 자신들의 전쟁을 위해 열악한 노동 현장에 조선인 소년들을 몰아넣었다.
김문길 부산외국어대학교 교수는 “이런 사실이 일본 오츠키소덴 출판사가 89년 발간한 책 ‘사진도설-일본의 침략’에서 처음으로 확인됐다”고 14일 밝혔다.
김 교수가 최근 후쿠오카 석탄박물관 탄광자료실에서 찾아낸 사진집에는 후쿠오카 지역의 한 탄광 영내에서 찍은 조선인 소년 노무자 73명의 입소 기념 사진이 실려 있다. 사진 속 소년들은 체구가 작고 얼굴에는 아직 젖살이 채 빠지지 않았다. 영락 없는 10대 초반의 소년들이었다.
김 교수는 “전쟁을 치르는 상황에서 일본은 초기에 끌고 간 조선인들이 탄광에서 많이 죽거나 탈출하면서 석탄 공급이 줄자 아이들까지 잡아가서 일을 시켰다. 이런 사실이 이번 사진으로 확인됐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비행기도 군함도 탄알도 석탄으로부터’라고 인쇄된 포스터도 같이 공개했다. 40년대 조선총독부가 만들어 전국 방방곡곡에 붙인 이 포스트는 당시 일본이 얼마나 석탄에 목말라 있었는지 보여준다. 포스터에는 총을 든 군인이 비장한 표정으로 한 손을 입가에 대고 함성을 지르는 그림이 함께 그려져 있다. 이 포스터는 지난해 12월 일본에서 발간된 사진집 ‘사진으로 보는 재일 코리아 100년사’에 실렸다.
조선인 징용은 30년대 후반부터 해방 직전까지 계속됐다. 전쟁이 막바지로 치달을수록 일본은 더 많은 석탄을 캐내도록 징용자들을 다그쳤다. 노동 강도가 세지면서 사고를 당하거나 병을 앓다 죽는 사람이 늘었다. 동시에 탄광촌에서 도망치는 사람도 증가했다.
일본의 특별고등과가 기록한 44년 3월자 ‘이입반도인 노무자에 관한 조사표(移入半島人勞務者ニ關スル調査表)’에 따르면 당시 후쿠오카 탄광 지역에서만 조선인 노무자 10만5784명 중 51.29%에 해당하는 5만4244명이 도망간 것으로 드러났다. ‘이입반도인’은 끌고 온 조선인(반도인)이라는 뜻이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조선총독부는 일종의 경고문까지 발표하기도 했다. 김 교수는 “조선인들이 잇따라 도망치자 석탄 공급에 차질을 빚을 수 밖에 없었다”며 “이는 일본 패전의 한 요인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강창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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