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 지구촌]‘일본의 경주’로 불리는 천년 고도 교토. 이 도시 관문인 교토역 바로 옆에는 무려 8만평에 이르는 ‘천민’ 집단거주촌이 있다. 몇년 전까지만해도 이 곳에는 상·하수도와 전기 공급이 안됐고, 지금도 곳곳에 지붕이 무너진 채 방치된 집들이 있다. 도쿠가와막부(1603∼1867) 시대부터 내려오던 신분차별제도는 19세기 후반 없어졌지만 차별의식과 가문중시 문화는 여전히 일본 사회에 뿌리 깊게 남아 있다.
이 곳에서 반 평생을 살아 온 나카구치 히로쓰구(60)는 “다른 곳으로 이사해도 법률상 원적이 안 지워져 평생 차별을 받는다. 취직도 어렵고 결혼도 기피대상이다.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 곳은 땅 값이 안 오르고 대출도 못 받는다. 도저히 살 수가 없다”고 말했다. 일본에는 아직도 천민집단으로 불리는 ‘부라쿠’민이 300만명이나 되고 천민마을도 4000여개나 있다.
교토역 인근, 수우진 마을로 불리는 이 곳은 1957년까지만 해도 1만명이 거주했으나 2001년 2800명, 2007년 1600명, 올해는 900명으로 인구가 급감했다. 젊은이들이 떠난 탓이다. 이 마을 유일의 초등학교는 지난 봄 문을 닫았다. 입학생이 단 한 명도 없었다. 마을 전체인구의 70%이상이 70세 이상 고령자다. 수우진 마을 옆, 3만5000평 규모의 구죠마을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일제시대 강제 징집되어 온 한국인 후손 100여명이 모여 사는 한인타운도 이 곳에 있다.
23일 이들에게 희망적인 소식이 찾아왔다. 숙원사업이던 재건축 사업이 처음 공론화된 것이다. 그동안 몇 번이나 재건축 얘기가 오갔지만 폭력조직의 개입 등으로 무산돼 주민들 사이에 불신만 쌓여가던 중이었다. 이들에게 믿음과 희망을 준 사람은 인권변호사 고바야시 세츠(60) 게이오대학 교수다. 교토산업회관에서 열린 재건축사업 공청회에 나온 고바야시 교수는 “나는 중금속 오염으로 왼손 없이 태어났다. 이 때문에 어릴 적부터 심한 차별을 받고 자랐다. 죽고 싶었고 나를 괴롭히는 이들을 죽여버리고 싶은 적도 있었다”고 말문을 뗐다. 그는 이같은 차별을 극복하고 게이오 대학과 하버드 대학을 졸업한 뒤 변호사 겸 교수로 활동 중이다.
그는 “21세기 일본에 아직도 이런 곳이 있다는 것은 행정의 태만”이라며 “다 같이 마음을 합해 이 마을을 교토의 자랑으로 변화시키자”고 말했다. 1000여석의 좌석을 빼곡히 메운 수우진·구죠 마을 주민들은 박수로 화답했다. 수우진마을에 사는 재일교포 나카구치 히메코(59)는 “세계문화유산이 있는 교토에는 많은 관광객들이 찾지만 그동안 정부가 우리 마을을 외부에 노출시키지 않으려고 교토역 출구부터 정문까지 한참을 돌아가도록 설계하기도 했다. 늦은 감이 있지만 지금이라도 재건축 된다면 다행”이라고 말했다.
일본 정부와 교토시도 이 사업에 적극적이다. 교토시는 250억엔(약 3325억원)을 중앙 정부에서 빌려 수우진마을의 75%를 매입했으며, 이 지역을 호텔과 상가로 탈바꿈시킬 계획이다. 일본 정부는 2016년 올림픽 유치를 겨냥해 역사·문화유적 도시 교토를 재정비할 방침이다. 글·사진 교토=국민일보 쿠키뉴스 한승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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