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위기 1년]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나

[금융위기 1년]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나

기사승인 2009-09-09 17:16:00

[쿠키 경제] “세계 경제는 우리가 상상한 것 보다 훨씬 더 위험한 곳으로 판명났다. 왜 세계는 이처럼 위험한 곳이 되었나?” (2008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폴 크루그만 프린스턴대학 교수)

리먼 브러더스 파산 이후 지난 1년은 세계경제와 금융시장에 대한 낙관론이 굉음을 내고 무너지는 시기였다. 지금까지 금융위기는 주로 ‘정실 자본주의(crony capitalism·시장원리보다 혈연 학연 지연 등 사적인 인연이 경제활동을 지배하는 후진적 경제시스템)’에 물든 남미나 아시아국가 등 주변부 자본주의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이번에는 미국·영국 등 핵심 자본주의국이 위기의 진앙지가 되면서 이들이 주도해 온 ‘글로벌 스탠더드’자체에 심각한 의문이 제기됐다.


무엇보다 금융은 규제가 적을수록 더 발전한다는 규제완화에 대한 믿음, 금융시장은 자체 조절능력이 있다는 ‘금융시장 효율성 가설’이 뿌리째 흔들렸다. 금융시장이 예상보다 훨씬 불안정할 뿐아니라 어쩌면 ‘불안정’이 금융시장 자체의 속성일 수 있다는 분석도 힘을 얻고 있다. 고삐 풀린 은행부문과 자본시장을 규제해야 한다는 데는 공감대가 이뤄졌지만 규제를 얼마 만큼,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과제로 남아 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이 한창 확대되던 2007년 여름. 화폐금융의 대가로 당시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이사였던 프레드릭 미시킨 컬럼비아대 교수는 캔자스 연방준비은행이 주최한 연례 심포지엄에서 이렇게 말했다. “FRB의 계량경제모델에 따르면 앞으로 2년간 주택가격이 20% 급락하더라도 미국 국내총생산(GDP)은 0.5% 하락하고, 실업률은 0.1%포인트 증가하는데 그칠 것이다.”

미시킨 같은 세계적 석학이 이처럼 결과적으로 ‘황당한’ 예측을 한 것은 당시 은행 감독을 맡은 FRB가 얼마나 금융산업 내부의 구조적 변화에 무감각했는 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전통적인 은행에 가해지던 규제와 감독의 레이더를 벗어나 새로운 방식으로 자금을 조달하고 투자하는 금융회사들이 2000년대 들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이들은 전통적인 은행에 비해 각종 정보와 활동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고 해서 ‘그림자 금융 시스템(Shadow Banking System)’이라고 불린다. 리먼 브러더스나 베어스턴 같은 투자은행, 헤지펀드, 구조화투자회사(SIV)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종래의 은행처럼 고객예금에 의존하지 않고 기업어음(CP) 등을 통해 단기로 자금을 조달, 금리가 높은 장기자산에 투자해 그 차익을 챙겼다. 당연히 만기불일치 위험이 컸다. 게다가 자본금 대비 부채비율인 레버리지가 보통 30배가 넘는 공격적인 투자를 단행, 금융시장의 체계적 위험을 한껏 높여 놓았다.

하지만 이들 ‘비은행-금융기관’에 대해 FRB는 고객 예금이 들어간 은행이 아니고, 금융혁신을 창출할 수 있다는 이유로 사실상 감독 대상에서 제외했다. 결국 이들은 주택 가격이 꺼지면서 각종 파생금융상품과 모기지채권이 부실화되자 줄줄이 파산, 전 금융시장 붕괴의 도화선이 됐다.

고삐 풀린 금융산업이 시스템 전반의 위기를 야기할 수 있다는 사실이 입증됨에 따라 이제 금융산업에 대한 규제는 돌이킬 수 없는 대세가 됐다. 지난 1년 앨런 그린스펀 전 FRB의장의 명성이 추락하는 것과 함께 ‘금융시장은 규제와 간섭이 적을수록 발전한다’는 그의 신념도 종언을 고하고 있다.

나라마다 금융감독 방안의 각론은 다르지만 큰 방향은 정해진 것으로 보인다. 금융감독 당국은 그동안 개별 금융회사의 회계 건전성을 주로 살피는 미시적인 금융감독에 집중해 왔다. 개별 금융기관이 건실하면 전체 금융 시스템이 건실할 것이라는 논리였다.

하지만 이번 금융위기에서 배운 교훈은 개별 기관과 자산만을 살피는 것으로 충분치 않다는 것이다. 전체 시장의 유동성, 부채의 증감 등 거시경제지표의 변화를 감안한 거시금융감독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에 힘이 실리고 있다. 미국의 경우 FRB에 권한을 집중시키는 쪽으로 금융감독체제 개편이 이뤄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연세대 경제학과 성태윤 교수는 “규제받지 않은 금융산업이 얼마나 치명적인 위험을 초래할 수 있는 지 입증됐다”며 “하지만 구체적으로 얼마만큼의 규제를, 어떻게 도입해야 금융혁신을 유지하면서 시스템 위기를 초래하지 않을 것인지에 대한 논의는 아직도 진행형”이라고 말했다.

통화정책 당국이 부동산 등 자산가격의 변동을 경시해선 안된다는 것도 금융위기가 남긴 귀중한 교훈이다. 이번 금융위기의 근본 원인은 FRB가 너무 오랫동안 1%대의 저금리를 유지한 데 있다. 이처럼 그린스펀이 저금리를 유지한 것은 당시 미국 물가상승률이 연 2∼3%로 낮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낮은 이자율로 인한 유동성의 팽창은 주택 등 자산가격의 지속적 상승을 가져 왔고 결국 부동산 거품의 붕괴로 금융시스템 전체가 마비되는 사태로 이어졌다. 미국 부동산 버블이 터지기 오래 전부터 국제결제은행(BIS)은 각국 중앙은행에게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낮더라도 자산시장의 거품 가능성에 강력 대응해야 한다고 촉구해 왔다.

고려대 경제학과 신관호 교수는 “이번 금융위기는 통화정책 당국이 결코 물가 상승률에만 집중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명확히 보여준다”며 “최근 우리나라의 부동산 가격 급등이 혹시 또다른 위기의 씨앗이 아닌지 유의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배병우 황일송 기자
bwbae@kmib.co.kr
배병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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