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人터뷰] ‘재칼’ 류승룡 “히스 레저가 내 발목 잡을 줄은…”

[쿠키人터뷰] ‘재칼’ 류승룡 “히스 레저가 내 발목 잡을 줄은…”

기사승인 2009-12-14 12:27:00

"[쿠키 영화] 좋은 배우에게는 필모그래피가 추가되면서 갤러리가 생겨난다. ‘첫 눈에 반한’ 작품 이전의 출연작을 찾아보고, 아주 작은 단역일 경우엔 ‘윌리를 찾아라’와 같은 찾기 놀이도 마다않는다. 영화에 관심 있고 연기파 배우를 좋아라하는 몇몇 블로그만 찾아봐도, 포털사이트 검색만 해봐도 연기파 류승룡을 추종하는 그들의 존재를 접하게 된다.

발자취, 류승룡의 체취가 배어나다

2004년 <아는 여자>의 분홍복면에서 <박수칠 때 떠나라>(2005)의 검사까지만 와도 류승룡을 기억하기 시작하는 사람들이 많고 <거룩한 계보>(2006)의 정순탄 역에 이르면 “최고의 연기” “포스터에는 정재영과 정준호가 나오지만 영화 속에서는 그가 주연”이라는 말을 서슴지 않는 팬이 형성된다.

<열혈남아>2006)에서 재문(설경구 분)의 죽마고우로 길지 않은 출연을 반가워하는 이도 있고, 짧고 굵기로 치자면 <굿모닝 프레지던트>(2009)의 북한 밀사 역이 최강이라고 입을 모은다. 14만 관객만이 만난 영화건만 절름발이로 나와 조재현에게 밀리지 않는 포스를 보여준 <천년학>(2007)을 가장 인상적이라고 평가하는 이도 물론 있다.

영화 <황진이>(2007) 속 희열과 드라마 <바람의 화원>(2008) 김조년에게서 세상살이에 강하면서도 사랑 앞에서는 작아지는 남자를 공통적으로 발견하며 작품을 넘어 캐릭터를 심화시켜가는 모습을 좋아하는 사람이 제법 많다. 같은 맥락에서 아이리스 소속 용병조직의 리더를 맡게 된 드라마 <아이리스>(2009)를 국정원 특수조직 하리마오를 이끄는 요원 은석으로 나왔던 영화 <7급 공무원>(2009)의 연장선상에서 반가워하는 이도 많다.

외모를 눈여겨보는 축에서는 <열한 번째 엄마>(2007) <불신지옥>(2009)에서의 생활에 찌든 남자와 판이하게 대별되는, <내 사랑>(2007) 속 카피라이터 정석의 스타일리시한 모습을 사랑한다.



오늘, 나를 비우고 재칼을 만나다

녹록치 않은 이력들을 거쳐 한발 한발 디뎌온 류승룡의 개성 연기는 <시크릿>(2009)에서 극에 달한다. 재칼, 이름처럼 한 마리 자칼 같기도 하고 걸쳐 입은 뱀가죽 재킷처럼 한 마리 독사를 연상시키는 이 캐릭터를 보고 배우 류승룡의 연기에 ‘이견’을 달 관객은 없을 것이다.

겨울의 문턱, 서울 삼청동 초입 2층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약속시간보다 30분 먼저 도착했다. “식사 하셨어요? 저 마파두부나 하나 먹고 올까 하는데, 같이 하시죠?” 서글서글한 웃음 어디에도 재칼은 없다.

“보통 역할을 맡으면 제 안 어딘가에서 그 캐릭터를 찾아내요. 연기의 출발점 정도라도요. 그런데 재칼은 제 안에서 캐낼 수 있는 캐릭터가 아니었어요. 저를 완전히 지우고 새롭게 다가가야 했죠. 쉽지 않았지만, 배우로서는 희열을 느낄 수 있는 작업이었습니다.”

강렬한 ‘킥’, 말 부리는 소리에서 착안

독특한 말투나 몸짓을 보여주는 캐릭터는 관람의 묘미를 북돋운다. <시크릿>의 재칼이 그렇다. 입을 오른쪽으로 살짝 비틀어 벌려 이 사이로 내는 ‘킥’ 소리나 백안을 반쯤 드러낸 부릅뜬 눈, 숨을 내뱉는 게 아니라 몸 안으로 끌어들여 나오는 것 같은 쉰 목소리는 관객의 눈을 재칼에 고정시킨다. 다른 영화에서 본 적 없는 개성적 행위는 동생의 살해자를 추격하는 재칼의 사나움을 한층 맹렬하게 부각시킨다. 특히 ‘킥’ 소리는 다른 어떤 말보다 강력한 ‘행동개시’의 명령신호로 작용하며 공포감을 조성한다. 어떻게 이런 디테일을 구상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 ‘킥’ 소리는요, 승마하는 분들은 아실 거예요. 저도 사극(영화 <황진이>, 드라마 <별순검> <바람의 화원>)을 하다보니 말을 좀 타게 됐는데요. 말을 출발시킬 때 ‘이랴’ ‘걸어’ 뭐 이러지 않거든요, 그냥 입으로 ‘킥’ 해요. 결국 조폭 졸개건 형사건 주변 사람들을 인간 이하로, 쓰레기처럼 부리겠단 거죠. 그 외의 눈빛, 확 달려드는 것 같은 손이나 몸의 움직임, ‘캬오’ 같은 소리는 자칼이나 뱀에게서 빌어온 거예요. 백과사전도 찾아보고 동물의 왕국 영상도 봤어요.”

‘킥’이 말을 부리는 소리에서 착안했다는 설명에 무릎을 쳤다. 사극 경험에서 조직폭력배 보스의 특징을 가져오다니 재미있는 반전이 아닐 수 없다. 입소리 하나 만들기 위해 얼마나 고민을 거듭했으면 동떨어진 두 영역이 만났을까 싶다.



저 세상 히스 레저, 승룡의 발목을 잡다

“아휴, ‘킥’소리는 어찌 보면 쉬운 거였어요. 비하인드 스토리 하나 말씀드릴까요. 재칼 역을 맡고 처음에는 내심 기뻤어요. 이거는 잘만 하면 크게 돋보일 수 있는 캐릭터다 싶어서요. 열심히 연구했죠. 드디어 첫 촬영일, 제가 만든 재칼을 선보였어요. 여기저기서 정도는 아녀도 몇몇 분의 감탄이나 탄성이 나올 줄 알았는데 잠잠한 거예요. ‘어라, 이거 뭐지?’ 싶었죠.”

얘기의 뒤가 궁금했다. “제가 이렇게 했어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류승룡은 양쪽 팔을 다리 옆에 붙인 채 몸을 약간 앞으로 기울여 한쪽 다리를 질질 끌면서 카페 안을 걸었다. 눈동자는 반쯤 뒤로 넘어가 있다. 자리로 돌아와 앉더니 눈알이 불안정하게 흔들리는가 하면 이따금 뒤를 돌아보고, 약간 더듬으며 말을 하다가는 혀를 날름거린다.

“누군지 아시겠어요? 저만 몰랐던 거예요. 윤재구 감독님 이하 스태프들이 일제히 ‘<다크 나이트> 안 봤어요?’ 이러더라고요. 당장 DVD를 구해서 봤죠, 아뿔싸! 정말 똑같더라고요. 그렇다고 배우로서의 자존심이 있는데 ‘관객 분들께 나는 몰랐다, 그 영화 안 봤다 이렇게 말해야지’ 우격다짐으로 밀고나갈 순 없는 노릇이잖아요. 이 세상에 없는 히스 레저가 제 발목을 잡을 줄 누가 알았겠어요.”

새로운 재칼의 시작, 그리고 흥행

다른 시공간에 존재해도 천재끼리는 통한다고, ‘연기의 천재’로 불리는 故 히스 레저와 동일한 발상을 했으니 결국 류승룡도 연기의 천재라는 방증 아니냐고 위로했다. 그가 만들어낸 ‘조커’를 볼 수 없었던 걸 안타까워하면서 말이다.

“자신감이 뚝 떨어지더라고요. 재칼, 못하겠다 싶었어요. 정말 머리에 쥐나도록 고민한 결과였는데 그걸 버리고 어찌 새로 시작할 수 있을까 막막했어요. 윤 감독께 못하겠다고 말씀드렸죠.”

하지만 ‘당신은 할 수 있다, 누구보다 잘할 수 있다’는 감독의 격려와 꾐을 받아들여 류승룡은 다시 재칼에게로 다가갔다. 그 때 포착된 게 말을 출발시키는 소리 ‘킥’이었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었다.

어렵게 만난 재칼은 배우 류승룡의 몸에 착 달라붙어 보는 이에게 ‘관람의 묘미’가 무엇인지를 실감케 한다. 하지만 그는 ‘재칼’ 연기에 대한 호평에, 심하게는 ‘영화는 몰라도 류승룡은 남겠다’는 얘기에 “재칼이, 류승룡의 연기가 <시크릿> 흥행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었으면 해요, 그게 가장 큰 바람입니다”라고 거듭 말했다.



<뉴문>에 없고 <시크릿>에 있는 것

진심이 느껴졌다. “영화를 첫 선택하는 관객에게는 차승원 씨나 송윤아 씨, <세븐 데이즈>의 각본을 썼던 윤재구 감독이 티켓 파워를 발휘하겠지만, 보신 분들이 주변에 입소문을 내주실 때는 ‘재칼 볼 만하다’라는 말을 얹어 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회를 거듭하면서 <시크릿>를 찾는 관객 중에 저를 보러 와주시는 분이 계셨으면, 영화 흥행에 저도 조금은 도움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배우에게 흥행, 자신이 흥행에 일조했다는 자신감은 중요한 것 같아요.”

<시크릿>은 개봉 첫 주 <뉴문>의 광풍에도 박스오피스 2위에 오르더니 2주차 4위로 물러섰다. 헐리우드 블록버스터 대작 신드롬이라도 일어난 듯, <뉴문>의 흥행은 <모범시민>의 동반흥행을 넘어 개봉한 지 한 달이 지난 <2012>를 3위까지 끌어올렸다. 미국영화 말고 한국영화 보자는 얘기가 아니다. 막대한 제작비로도 어찌 만들어낼 수 없는, 좋은 배우의 맛난 연기를 확인하는 즐거움을 누려보잔 거다. 흉내 낼 수 없는 배우의 호연은 표 값에 대한 기억을 지울 것이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홍종선 기자 dunastar@kmib.co.kr"
홍종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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