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피플]연세대 의사 인요한 소장 “광주 사망자 600명 명단 봤다”

[쿠키피플]연세대 의사 인요한 소장 “광주 사망자 600명 명단 봤다”

기사승인 2010-05-19 13:07:00
[쿠키 사회] 1980년 5월25일 190㎝의 큰 키에 비쩍 마른 벽안의 청년이 전남도청에 들어섰다. 당시 광주는 쿠데타 세력에 의한 고립의 섬이었다. 민주항쟁의 진실이 외부로 알려지지 않는다는 사실에 광주시민들은 좌절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은 외신기자들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시민군에 통역할 사람이 없다보니 비극의 전달에 애로를 겪고 있었다.소통의 부재속에서 이 외국 청년의 등장은 한줄기 빛이었다. 영어와 한국어가 능숙한 이 청년은 기자회견을 주선했고 광주의 아픔은 본격적으로 세계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는 이곳에서 시민군의 애타는 눈빛, 자식잃은 어머니의 통곡, 억울한 죽음을 목도했다. 이 기억은 30년이 지난 지금도 오롯이 남아있으면서 그의 삶을 지탱해주고 있다. 18일 만난 연세대 세브란스 병원 국제진료센터소장 인요한(50·사진)씨는 당시 일을 어제 일처럼 풀어나갔다.

-광주민주화운동에는 어떻게 접하게 됐나

“당시 연세대 의예과에 합격했는데 계엄 때문에 입학 두달만에 휴교가 됐다. 같은 1학년이었던 지금의 아내에게 고향 순천에 놀러가자고 해서 왔다. 내려오던중 한 청년이 우리가 타는 버스로 올라오더니 ”광주에서 많은 사람들이 계엄군에게 죽었습니다. 이럴 수는 없습니다.”하고 소리쳤다. 순천에 와보니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었다. 도저히 가만히 있을수 없어 친구 한명과 25일 광주로 갔다.도시 전체가 장례식장 같은 분위기였다.

-시민군과 외신기자들 사이에 어떤 대화가 오고 갔나

“당시 시민군은 기자들에게 ‘북으로 향해야할 총부리가 왜 우리에게 돌아왔는지를 이해할 수 없다. 있을수 없는 일이다” “세계가 이 사건을 제대로 알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외신기자들은 ‘현재 시민군이 보유한 식량 및 물 등의 상황이 어떻게 되고 있는 지’ 등을 질문했다. 기자회견을 마치고 시민군에 다음날 다시 오겠다고 약속하며 밤늦게 광주를 빠져나왔다.아버지가 미국 대사관에 이 사실을 알려야 한다고 해서 다음날 서울로 갔지만 대사관측은 별 반응이 없었다. 27일 새벽 라디오로 군이 도청에 진압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광주 30주년을 맞는 소회는

“광주항쟁(광주민주화운동)은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세계에서 인정하는 수준의 민주주의로 올려놓은 사건이었다. 가장 가슴아픈 것은 북한을 향하고 우리를 지켜줘야하는 총들이 남한을 향해, 광주를 향해 있었다는 것이다. 더 안타까운 것은 영남 서울 등 타 지역 사람들이 아직까지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해 잘 못 알고 있는 점이다.”

-광주는 인소장에게 어떤 의미인가

“무등산에는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한다는 뜻이 있다. 광주민주화운동은 그 의미대로 진행된 것이다. 광주 때문에 대한민국이 민주화 된 것이다. 아직도 빨갱이 운운하며 비하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당시 현장에 있던 사람으로서 말이 안되는 얘기다.

아침마다 시민군들이 반공 구호를 외치고 하루 일정을 시작했다.도청에서 나를 위해 보초섰던 학생은 수상한 사람을 잡아서 군인에게 넘겨주고 오기도 했다. 다른 곳에 사는 사람들이 광주 사람들이 겪은 아픔과 희생의 후유증을 이해해줘야 한다 .광주항쟁은 미국 독립운동이나 3 1운동보다 레벨이 높다고 생각한다”

-민주화 이후 진실이 많이 밝혀졌는데도 광주민주화 운동에 대해 폄하가 빈번해지고 있는데 그 이유는

“노동계와 시민운동 학생운동이 변질이 돼서 그런다. 존경을 못받는다. 민주화운동의 후대들이 높은 도덕을 지키지 못해 실망을 준 때문이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때 그 성향 사람들이 더 잘할 거다 믿었는데 똑같이 권력남용하고 그랬다. 진보세력들이 지난 15년간 높은 도덕성을 보여주지 못했다.그래서 광주를 비하시키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빌미를 준 것이다.”

-광주의 본질을 살리거나 의미를 알게하려면

“전남도청을 영원한 박물관으로 만들어야한다. 당시 잘못한 사람들이 이제는 회개 했으면 좋겠다. 동시에 광주도 용서를 해야한다. 90년대 정계은퇴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을 독대한 적이 있었다. DJ에게 ‘전두환에게 그렇게 당했는데 나같으면 보복하겠다’고 하니까 DJ가 환하게 웃으며 ‘인선생, 보복하면 뭐하겠나. 아무 필요 없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

-스스로 광주에 빚을 졌다거나 하는 생각을 가진 적은 없나

“내가 광주항쟁 기간 시민군으로부터 600명의 사망자 명단을 봤다. 그것을 카피(복사)해서 가지고 나오지 못한 점이 지금도 후회스럽고 한스럽다. 그것이 (전남도청)진압 전 숫자였다. 현재 공식 사망자수는 200명 안쪽 아닌가.”

인요한 소장과 한국과의 인연은 100년전 이땅에 복음의 씨앗을 뿌렸던 진외증조부(친할머니의 아버지) 유진 벨 목사때부터 이어진다. 당시 호남에서 사역했던 유진 벨 목사에 이어 할아버지 윌리엄 린튼, 아버지 휴 린튼,인 소장이 차례로 뿌리를 내렸다. 인 소장은 전북에서 태어나 전남 순천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선대의 뜻에 맞게 인 소장은 한국에서 의료사업을 활발히 하고 있으며 90년대말부터 북한 결핵퇴치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대북사업도 활발한데 북한과의 인연은 어떻게 이어졌나

“1996년 어머니가 의료봉사와 사회사업의 공을 인정받아 삼성문화재단이 주는 호암상을 탔다. 어머니는 그 성금으로 엠뷸런스를 구입해 북한에 전달하고 싶다는 말씀을 하셨다. 이듬해인 1월에 북한에서 전달식을 가졌고 그것이 대북사업의 시작이었다.”

-요즘 남북관계가 냉각돼 대북사업도 차질을 빚을텐데

“그동안 북한의 결핵퇴치사업에 매진해왔다. 현 정부 들어 남북관계가 좋지 않은 상황에서 최근 천안함 사건까지 터지면서 NGO들의 대북사업이 올스톱 되다시피했다. 차세대 결핵 검진차를 만들어 북한에 보내려고 했는데 인천에서 1년째 못들어가고 있다. 결국 반출승인이 안돼 중국으로 갈 상황에 놓여있다. 이것이 말이 되느냐.

-천안함 사태를 어떻게 봐야하나

“이유없이 희생당한 것은 얼마나 미칠 일인가. 하지만 (북에 대해) 보복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보복을 하면 시원하겠지만 보복을 안할수 있으면 나중에 통일될때도 (한반도가) 피바다 될 가능성이 줄어든다.과거는 묻지 않겠다. 용서하겠다 이렇게 나갔으면 좋겠다. 광주민주화운동은 (북한) 군부로부터 당한 천안함 사태와 같다. 이유없이 무차별로 당한 것이다. 그러나 광주 사람들과 김대중 전 대통령은 보복을 하지 않았다. 보복은 해법이 아니다.

-천안함이 북한의 소행이라고 확신하나.

“(천안함 사고원인을) 조사한 팀 멤버중 한명이 환자로 왔는데 ‘(북한소행이) 100%다.의심의 여지가 없다’라고 말했다.내가 1%라도 의심할만한 것이 있느냐고 하니까 1%도 없다고 하더라. 그리고 정부를 좀 믿었으면 좋겠다. 우리는 일제하와 독재정권 때문에 정부를 안 믿는 문화가 있다.그런면에서 중립국가 사람들을 조사단에 포함시킨 것은 잘 한 일이다. 그 사람들은 편견을 가질 이유가 하나도 없다.

-남북관계를 어떻게 풀어야한다고 보나

“솔직히 천안함 때문에 남북관계는 살벌할 정도다. 우리가 인도적 지원과 정치적 압박은 분리해야한다고 본다. 북한은 국민하고 통치 정권을 별개로 봐야한다. 자꾸 북한의 국민을 어렵게 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인도적 지원을 대북압박의 도구로 삼아서는 안된다. 싸움은 사람과 사람이 대립할 때 많이 발생하는 법이다. 이때일수록 더 만나고 얘기해야 관계가 풀리는 것 아닌가.우선적으로 금강산 관광을 재개해야한다. 유일하게 유지되고 있다시피하고 있는 개성공단의 발전이 이 시점에서 더욱 중요하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글=고세욱, 사진 이병주 기자 swkoh@kmib.co.kr
고세욱 기자
swkoh@kmib.co.kr
고세욱 기자
이 기사 어떻게 생각하세요
  • 추천해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추천기사
많이 본 기사
오피니언
실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