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Z 사람] 연극무대로 돌아온 명계남…연극, 영화, 노무현 그리고 ‘분노’

[Ki-Z 사람] 연극무대로 돌아온 명계남…연극, 영화, 노무현 그리고 ‘분노’

기사승인 2010-10-24 15:46:00

"[쿠키 문화] 지금의 30대 이상들은 한번쯤 들어봤을 법한 1990년대 ‘영화 이분법’이라는 말이 있다. 국내에서 제작된 영화는 크게 두 종류라 해서, 바로 ‘명계남이 출연한 영화’와 ‘명계남이 출연하지 않은 영화’로 나뉜다는 것이다. 명계남 이후 다작을 하는 명품 조연들에게 이러한 이분법은 종종 적용되어, 김갑수, 성동일 등이 스크린과 브라운관에서 이 말의 계보를 이었다. 그만큼 ‘명배우’ 명계남은 한때 영화계에서 보석 같으면서도 독특한 존재였다. 그런 명계남이 2002년을 대선을 기점으로 인생이 완전히 달라졌다.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의 대표로 故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만드는데, 커다란 역할을 수행했지만 명계남 개인에게는 이후 가시밭길이 시작됐다.

신학을 꿈꾸던 학생, 연극-영화에 빠지다

1952년생인 명계남은 신학을 꿈꾸며 연세대 신학과에 진학하지만, 연희극예술연구회 활동을 시작으로 연극무대에 진출하게 된다. 명계남은 한 강연회에서 당시를 회상하며 “연극을 하면서 제 가슴 속에서 일어나는 감동이 관객들에게 하나씩 심어지는 것을 눈빛으로 마주치는 게 너무 신이 났다. 내가 제일 잘할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73년 에드워드 올비의 ‘동물원 이야기’를 시작으로 85년까지 ‘환상 살인’ ‘슬픈 카페의 노래’ ‘팽’ ‘빵’ 등의 연극을 기획, 출연했다. 그러나 이후 85년부터 92년까지 카피라이터, 이벤트 플래너, 리조트 개발계획 등 8년 가까이 평범한 직장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런 명계남이 93년 다시 연극 무대로 돌아왔고, 영화 <그 섬에 가고싶다> (1993)의 출연 계기로 영화계에 진출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96년에는 영화사 ‘이스트 필름’을 만들어 97년 <초록물고기>를 제작, 그해 최고의 화제작으로 각종 상을 휩쓸게 된다.

명계남은 영화 진출에 대해 “내가 영화를 하게 된 동기는 친구 문성근 때문이다. 직장생활을 그만두고 다시 연극 무대로 돌아왔을 때, 그 친구가 나에게 제의를 했다. 영화 쪽에 말과 연기가 되는 중견배우가 없다며 같이 하자고 했다. 또 그 무렵에는 젊은 신인 감독들이 대거 등장해, 기존 이미지가 없는 새로운 배우를 찾기 원했다. 시기가 적절하게 맞아서 나에게 많은 역들이 주어졌다”고 설명했다.

그 이후 50여편이 훌쩍 넘는 작품에 출연하면서 앞서 언급했듯이 한국 영화에 이분법적을 적용시켰고, 1997년 <초록물고기>로 청룡영화상 작품상, 영화평론가협회의 최우수 작품상, 백상예술대상 작품상을 받았고, 2000년에는 <박하사탕>으로 대종상 영화제 최우수 작품상과 카를로비바리 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을, 2002년에는 <오아시스>로 베니스영화제 신인배우상을 받는다.

영화 제작과 출연을 활발히 하던 명계남은 어느 새 영화인들을 대변하는 사회적 활동에 참여하게 된다. 1998년에 스크린쿼터 감시단에서 정지영 감독과 공동단장을 맡은 이후, 영화인회의 사무총장, 문화개혁시민연대 부집행위원장 그리고 2001년 부산영상위원회 운영위원장을 역임했다.

‘명배우’ 명계남이 언론사 문화 지면에 올랐던 것은 이때까지였다. 2002년 명계남은 문화 면이 아닌 정치와 사회면을 장식하기 시작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명계남

2000년 ‘자연인’ 노무현은 4.13 총선 당시 부산에 출마하지만 지역 감정을 벽을 넘지 못하고 낙선하게 된다. 이에 노무현의 낙선을 안타까워한 누리꾼들은 노무현의 홈페이지를 방문해 격려의 글을 쏟아냈고, 이어 한 누리꾼이 ‘팬클럽을 만들어 보자’라는 제안이 국내 첫 정치인 팬클럽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이하 노사모)이 결성케 한다.

이후 여러 차례 회의와 창립총회를 거친 노사모는 2000년 7월 20일부터 22일까지 전자투표를 통해 명계남을 노사모 공식 첫 대표회장으로 추대하게 된다. 당시 노사모 온라인 프로그램에 등록된 총회원은 745명이고, 투표에 참여한 이들은 186명이다. 그야말로 단촐한 모임었고, 명계남은 현재로 말하면 일개 인터넷 카페 운영자보다 못한 모임의 대표였다.

그러나 이후 민주당 국민경선이 시작되던 해인 2000년에는 2만 명이 훌쩍 넘는 회원들이 가입했고, 전국 27개 지부와 해외지부까지 설립된 거대 단체로 성장한다. 그리고 그 힘은 그해 3월 16일 있었던 광주 경선에서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당시 언론들은 ‘한국 최초의 정치인 팬클럽’ ‘노풍의 눈’ ‘국민경선장의 붉은 악마’ ‘국민후보의 든든한 버팀목’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하던 명계남이 있었다.

그러나 2002년 대선이 끝난 후, 명계남은 노 전 대통령의 반대파들의 적이 되었다. 내각이 구성될 때마다 공공연히 명계남과 문성근의 이름이 올랐고, 명계남의 말 하나, 행동 하나가 대서특필되었다. 급기야는 전혀 상관도 없는 사행성 게임 ‘바다이야기’ 사업에 명계남이 연루되었다는 주장까지 제기되었다. 물론 무혐의 판결이 났지만, 명계남은 공공연히 “난 바다이야기 연루 의혹 이후 죽은 사람”이라며 억울해했다. 아직도 적잖은 사람들이 이를 떠올리기 때문이다.



명계남의 가시밭길은 이게 끝이 아니다. 아니 어떻게 보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브라운관과 스크린에서 명계남의 모습은 찾을 수 없게 됐다. 2008년 1월에는 한국영화감독협회가 ‘명계남 문성근은 영화계를 떠나라’라는 요지의 성명을 냈고, 뭐가 섭섭했는지 엉뚱하게 김흥국은 2008년 총선 불출마 선언 기자회견에서 “명계남은 나쁜 사람이다”라고 발언하기도 했다. 어느 언론의 말대로 한마디로 ‘동네북’이 된 것이다.

같이 노사모 활동을 했던 문성근이 다양한 영화에서 활동하며, 서서히 회복했지만 명계남은 도리어 더 강한 채찍을 맞은 셈이다. 당시 명계남은 “나와 관계된 모든 사람들은 다 피해를 보고 있다. 영화 제작자 일을 더 이상 못하겠다”며 “어떤 감독이 나를 배우로 쓰려고 했더니 투자자가 곤란하지 않겠냐고 했더라”라고 말했다. 실제 영화와 관련된 그의 활동은 그 이후 사라졌다.

‘독재자’를 비판하는 명계남, 다시 울분을 토하다

그런 명계남이 최근 연극 무대로 돌아왔다. 그런데 이 연극의 제목이 ‘아큐-어느 독재자의 고백’이다. 현 정부에 대한 비판과 조롱을 담았다.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비판임을 숨기지 않는다. 명계남이 쏟아내는 대사 역시 직설적이다. 우회적인 발언이 없다. 연극 중간에 노 전 대통령의 서거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는 눈물을 보이기까지 하다.

극중극 형식의 연극에서 명계남은 가상의 국가 독재자로서, 이명박 대통령으로서, 이들을 연기하는 배우로서 그리고 ‘명계남’ 이렇게 4가지 인격을 보여준다. 인격이 충돌되고 힘들어한다. 연출을 맡은 여균동 감독과 주거니 받거니 하는 장면은 명계남의 진심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이런 연극을 과연 맡아야 하는지도 고민했다고 한다. 명계남은 “처음에는 독재자만의 잘못이 아니고 그 상황이 있게 한 우리들 스스로의 문제들을 꼽씹어 보자라고 한 것이 이 연극의 취지였다. 독재자에 대한 손가락질이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한 손가락질이었다. 그래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서 시작했는데, 하다보니 말도 안되게 답답해서 하기 싫다는 생각도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어쨌든 명계남은 무대에 섰고, 울분을 토하고 있다. 혹자는 이를 명계남이 다시 정치적으로 움직이려 한다고 말한다. 특히 문성근이 ‘100만 민란’을 준비하고 있던 시점과 절묘하게 어울러져 더욱 그런 시선이 있었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다시 명계남은 정치적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관심을 받게 됐다. 사회가 그를 다시 주목케했는지, 아니면 그 스스로 그러한 상황을 만들었는지는 몰라도 말이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유명준 기자 neocross@kukimed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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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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