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人터뷰] 고민정 아나운서 “그래도 시인과 결혼하길 잘했어요”

[쿠키人터뷰] 고민정 아나운서 “그래도 시인과 결혼하길 잘했어요”

기사승인 2010-10-28 15:07:00

"[쿠키 연예] 5년 전까지만 해도 ‘KBS 아나운서’로 더 많이 알려졌다. 하지만 결혼과 동시에 ‘아나운서’라는 명함 앞에 수식어가 생겼다. 시인 조기영과 결혼하면서 생긴 애칭 ‘시인의 아내’다. 대학시절 첫눈에 반한 과 선배와 결혼식을 올린 고민정 아나운서는 지난 5년 동안 ‘시인의 아내’이자 ‘한 남자의 여자’로 행복한 삶을 살았다.

그렇지만 온전한 행복은 지상에서 꿈꿀 수 없는 것일까. 현실과 이상을 가로막는 벽이 모래알처럼 쌓이더니 이내 돌덩이처럼 굳어져 시야를 가릴 정도가 됐다. ‘KBS 아나운서’이자 ‘시인의 아내’라는 두 가지 삶이 고단하게 다가왔고, 쉼이 필요했다. 그렇게 그의 인생을 밝혀줄 지표가 될 ‘샹그릴라’를 찾는 여행이 시작됐다.

당시 진행하고 있던 ‘무한지대 큐’와 라디오 ‘밤을 잊은 그대에게’ 마이크를 무작정 내려놨다. 살고 있던 집과 차도 팔아 여행경비를 마련하고 남편을 설득한 끝에 함께 중국 여행길에 올랐다. 어느 덧 1년이 흘렀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1년 전과 크게 다를 바 없는 현실이다. 대신 중국 샹그릴라와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앓았던 성장통이 오롯이 새겨진 에세이 ‘샹그릴라는 거기에 없었다’가 그의 곁에 있다.

가을바람이 제법 매서웠던 오후, 서울 홍대 마키테라스에서 그를 만났다. 아나운서라는 직업이 가져다준 편견이 깊숙이 자리 잡은 것일까. 실제로 만나본 고민정 아나운서는 매섭다기보다는 유순했고, 화려하기보다는 수수했다. 길을 가다가 문득 마주 대한 들꽃처럼 편안하고 정겨웠다. 간간히 비속어를 섞어가며 대화에 양념을 치는 모습에서는 인간미가 느껴졌다. 어디 하나 모 나는 구석이 없어 인터뷰 내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봤을 정도다. 봄도 아닌데 그녀에게서는 들꽃 냄새가 났다.

인터뷰 장소를 카페로 정한 것은 그가 여행지에서 찍은 사진과 집필한 책을 한눈에 접할 수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카페 벽면 한쪽에는 샹그릴라가 단조로운 벽지 문양에 멋스러움을 주는 명화처럼 박혀있다. 샹그릴라는 중국 윈난성 디칭티베트족 자치주에 있는 현이자 영국 소설가 제임스 힐튼의 소설 ‘잃어버린 지평선’에서 그린 지상에 존재하는 유토피아다.

고민정 아나운서는 지난 1년 동안 샹그릴라를 찾아 떠났다. 책을 내기 위해 여행을 간 것은 아니다. 숙소 예약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발길 닿는 대로 가보겠다며 떠난 배낭여행이었다. 중국에서의 일상을 간간이 블로그에 남기던 중 출판사 몇 군데로부터 집필 제의를 받아 발간하게 됐다. 글을 쓰는 걸 좋아하는 성격이지만 행여나 졸작을 만들어 시인인 남편의 체면을 깎아내릴 수 없었고, 현업 작가에게도 누가 돼서는 안 될 것 같아 선뜻 내키지 않았다. 그러다가 일상 곳곳에 흩어졌던 이야기 조각을 맞추다보니 자신감이 생겼다. 남편의 응원도 한몫했다.

“어느 날 남편이 ‘민정아 네가 쓴 글을 보면 네 마음을 솔직하게 잘 표현하는 것 같아. 글을 한 번 써보지 않을래?’ 그러기에 ‘에이. 글은 작가나 쓰지 내가 무슨’ 체념했죠. 그러다가 치열한 삶에서 한 발짝 뒤로 물러나 보니 저도 하나 둘 풀어낼 이야기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책 제목도 당초에는 ‘그 사람 더 사랑해서 미안해’였다. 느지막이 얻은 막내딸이 KBS 아나운서가 되자마자 11살 연상의 시인인 남자를 데리고 왔을 때, 그의 부모는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지만 딸을 쉽게 내어줄 수 없었다. “1년만 더 지켜보자”는 아버지의 부탁에 왈칵 눈물이 쏟아졌지만 한 살 두 살 먹으면서 부모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제가 데려온 남자가 어떠셨는지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군소리 한 번 하지 않으셨던 부모님이에요. 제가 좀 무뚝뚝해서 엄마랑 화장품 사러 한 번도 가지 않았거든요. 엄마는 늘상 ‘민정이가 대학가면 민정이가 쓰던 화장품 쓰고, 옷도 빌려 입어야겠다’ 하셨는데 전 대학시절 민중 노래패 회장을 맡아 꾸밀 새가 없으니 그마저도 안 됐죠. 그러다 아나운서가 되고 1년 만에 결혼을 하겠다고 했으니 엄마의 마음은 오죽하셨겠어요. 결혼하고 엄마 생각이 참 많이 나더라고요. 그런 엄마에 대한 미안함을 담아서 책 제목으로 하려 했는데요. 내 안의 목표를 찾아 샹그릴라로 떠난 여행이 주된 내용이라 지금 걸로 바꿨어요.”



사실 그가 중국행을 택하기까지 마냥 쉬웠던 것은 아니다. 휴직계를 내고 다녀온 뒤에 치열한 경쟁 속으로 뛰어들어야 했고, 급변하는 시청 패턴에 꾸준히 나오지 않으면 뒤쳐졌기에 이번 여행은 그에게 모험과도 같았다. 하지만 눈앞의 이익에 안주해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샹그릴라를 찾아 떠나야 했다.

“아나운서를 하면서 즐거웠지만 그게 제 꿈의 전부가 아니라는 걸 느꼈어요. 이대로 있다가는 제 안에 있는 모든 게 멈출 것만 같았죠. 다들 ‘움켜쥔 것을 다시 잡기도 어려운데 왜 놓으려고 하냐’ 반대했어요. 하지만 전 제 안의 가능성이 더 크리라 믿었습니다. 게다가 ‘시인의 아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난 뒤로 부담감도 컸고요. ‘시를 몇 개라도 줄줄 읊고 있을 것 같다’ ‘시인과 결혼하다니 착할 것 같다’ 사람들의 편견도 답답했고요. 그렇게 ‘시인의 아내’는 저를 옭아매는 족쇄가 됐죠. 전 제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가능성이 있는지 알고 싶었어요. 샹그릴라로 떠난 곳도 제 안의 유토피아를 찾고 싶었고, 그곳을 간다면 제가 모르는 저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요.”

샹그릴라는 고민정 아나운서에게 쉽사리 길을 열어주지 않았다. 의식을 치르듯 고산병에 걸려 며칠 동안 시름시름 앓은 뒤 몇 시간을 더 올라가서야 위뻥마을에 자리 잡은 진정한 샹그릴라를 발견했다. 남편의 응원에 힘입어 도전하게 된 아나운서, 몇 번의 낙방 끝에 거머쥔 ‘KBS 아나운서’ 자리, 안정된 생활과 함께 시작된 행복한 결혼, 현실과 이상의 괴리에서 신음하던 나날들. 지나온 시간이 한 편의 영화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토록 원했던 아나운서 위치에 올라갔음에도 진정한 행복을 느낄 수 없었던 그의 모습처럼 샹그릴라도 그 이상은 아니었다. 샹그릴라는 또 다른 샹그릴라를 찾기를 바라는 아쉬움을 남긴 채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아나운서 시험에 붙기만 하면 행복만 펼쳐질 거라고 생각했어요. 물론 되고 나니까 한동안 즐거웠죠. 하지만 그 이후론 힘들어지더라고요. 그러다 5년차가 넘어가니까 ‘아나운서라는 옷을 입고 내가 말만 읊조리는 게 아닌가’ 근본적 고민이 생기더라고요. 그건 샹그릴라를 찾아 떠난 여행과도 정말 비슷했어요. 샹그릴라에 도착해보니까 상상한 그 무엇이 없더라고요. 샹그릴라를 제 눈으로 확인했으니 이제 제 인생의 유토피아를 찾으러 가야겠죠. 아마도 샹그릴라는 죽을 때쯤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요? 샹그릴라를 찾아 떠나면서 제 인생의 롤 모델이 생겼는데요. 바로 나눔의 상징인 톱배우 오드리 헵번처럼 사는 거예요. 인기를 얻는 것과 베푸는 것은 이율배반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나운서라는 위치를 활용해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거 같더라고요. 제 재능을 기부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고민정 아나운서는 끝까지 자신의 글이 졸작이라며 겸손해했다. 하지만 그가 쓴 글은 포근했고 감미로웠다. 간결하면서도 진솔하게 응축시켜놓은 남편 조기영과의 사랑 이야기를 읽어나가자니 설렘이 새록새록 피어났고, 사회인으로서 고심하면서 방황하는 부분에서는 초년생의 떨림을 회상할 수 있었다. 중국에서의 여행 과정은 꼼꼼한 가이드 북을 읽는 것처럼 친절했다. 과거와 현재를 유려하게 넘나드는 그의 필력에 ‘작가’라는 명함을 달아주고 싶었으나, 그는 한사코 “‘작가’라는 명함은 전업 작가에게만 붙이는 것”이라며 정중히 거부했다. 자신은 그저 감수성이 약간 예민한 사람 정도로만 알아달라고 당부했다.

고민정의 사랑 이야기는 5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아련하고 따뜻하다. 과선배로 조기영의 정갈한 글씨체에 반한 그는 반듯한 인상과 따뜻한 말투를 지닌 남편에게 모든 걸 걸었다. 그리고 지금도 그는 과거의 사랑을 잊지 않은 듯 두근거리고 있었다.

“물질적으로 부족해 힘들지 않냐고 물어보시는데요. 전 시인의 아내라서 행복해요. 삶을 촉촉하게 살 수 있고, 저의 예민한 감정을 나눌 수도 있고요. 남편과 산이 내려다보이는 거실에 앉아있는 걸 좋아하는데요. 천천히 가는 시간 속에 맡기면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행복해요. 우리는 일심동체가 되는 부부가 아니라 철도처럼 나란히 한 목표를 향해 가는 게 목표예요. 저 시인과 결혼하길 잘한 것 같아요(웃음).”

고민정의 ‘샹그릴라’ 찾기에 동참하고 싶다면 서울 홍대 마키테라스로 가보면 어떨까. 오는 30일까지 고민정이 직접 찍은 여행 사진과 독자에게 남긴 방명록을 만날 수 있다. 다음달 13일에는 오후 3시 경기도 일산 롯데백화점 내 문화홀에서 북콘서트를 열 계획이다. 고민정 아나운서가 마이크를 잡고 절친한 친구이자 가수인 박기영이 축하공연을 한다. 남편이자 시인인 조기영의 깜짝 출연도 조율 중이다. ‘샹그릴라는 거기 없었다’에 조금이라도 촉촉한 감성을 느낀 독자라면 누구나 참여 가능하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김은주 기자 kimej@kmib.co.kr"
김은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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