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 영화] 영화 한 편이 사회에 끼칠 수 있는 영향력은 어느 정도일까. 단순히 흥행을 목적으로 해 1천만 관객을 모으며,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도 커다란 영향일 수 있지만, 관객들의 의식은 물론, 사회 제도, 법까지도 뒤흔든다면 그것은 이미 영화의 영역을 벗어났다고 볼 수 있다.
지난 9월 22일 개봉한 영화 ‘도가니’가 그렇다. ‘도가니’는 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집계 9월 30일까지 179만2985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개봉한지 8일만의 쾌거다. 그러나 이 숫자는 이미 무의미해졌다.
‘도가니’는 공지영 작가의 원작 소설을 기반으로 하지만, 이 역시도 지난 2005년 광주 인화학교에서 벌어진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당시 이 학교 학교장 및 관계자들이 미성년 장애우를 대상으로 성폭력을 저질렀지만, 관계자들은 집행유예 판결을 받았다. 사실상 무죄 판결이다.
‘도가니’ 개봉 후 광주 인화학교 성폭력 사건에 대해 재조사를 요구하는 서명 운동이 벌어졌고, 사흘 만에 5만 명을 가뿐히 돌파했다. 광주 인화학교 성폭력 대책위가 학교 법인 우석과 광주시 교육청에 사건 재조사를 요청한 것이다.
광주 인화학교의 관할 기관인 광주시 교육청은 재조사 특별팀을 구성한다는 방침을 내놨다. 영화에서 교육청 관계자들이 성폭력에 대해 “우리 관할이 아니다”라며 시청 탓으로만 돌리는 등의 모습은 관객들의 질타를 받았다.
신임 대법원장도 입을 뗐다. 27일 취임한 양승태 대법원장은 취임식 후 서초동 대법원 청사에서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광주 인화학교 사건 당시) 그때 법과 양형기준으로 처리한 거라 당시에는 별 이상이 없었지만 이후에는 양형기준이 많이 올라갔고 법 자체도 바뀌었다”며 “국민이 분개하고 있는데 어떤 경로로든 해명을 할 필요도 있을 것 같다”고 밝혔다. 이후 직접 관람한 후 “충격적”이라는 반응도 보였다.
이런 분위기는 정치권으로까지 이어졌다. 지난 30일 국회 교육과학기술위원회의 광주·전남 시도교육청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여야 의원 대부분은 영화 ‘도가니’의 실제 모델인 광주 인화학교 성폭력 문제를 집중 성토했다.
김영진 민주당 의원은 “청각 장애 학생 성폭력 문제를 수수방관했던 교육당국과 극악한 범죄에 면죄부를 준 사법부에 유감”이라고 지적했고, 주광덕 한나라당 의원은 “범죄를 저지른 교사가 다시 학교에 와 근무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며 “징계 심의시 엄정한 분위기 조성에 노력해 달라”고 당부했다.
각 당 지도부 역시 한목소리로 이번 사태의 심각성을 언급하며 장애인 인권보호를 위한 대책 마련 등을 약속했다. 정치권은 학교재단 운영의 투명성을 높이기 위해 회계·결산보고를 의무화하거나 공익이사의 참여를 의무화하는 사회복지사업법(일명 도가니방지법) 개정안 재도입에도 나섰다.
홍준표 한나라당 대표는 당 최고위회의에서 도가니 방지법의 발의를 예고하며 조속 통과를 촉구했다. 민주당 역시 사회복지사업법 개정안을 당론으로 발의하기로 결정했다.
이런 분위기는 영화의 연령대를 낮추는 방안을 추진하기에 이르렀다. ‘도가니’ 황동혁 감독은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도가니’를 청소년들이 볼 수 있도록 15세 관람가 등급을 받아 재개봉을 추진 중이라고 밝혔다. 개봉한 지 이제 일주일 밖에 안 된 영화로는 이례적이다.
물론 이에 대한 관심 자체를 촉구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인화학교성폭력대책위(이하 대책위)가 지난 2005년 발생한 광주 인화학교 청각장애인 학생과 교직원 사이 성폭행 사건의 피해자 보도를 자제해줄 것을 언론사에 요청했다. 대책위는 29일 공식 보도자료를 통해 “관심과 취재로 인해 피해학생 및 그 가족들의 아픈 기억이 다시금 되살려지고 있음에 대책위는 우려하고 있다”라며 “피해자들에 대한 과도한 관심과 밀착 취재 등은 부담스러움을 넘어 또 다른 폭력이 될 수 있음을 말씀드리고 싶다”라고 전했다.
이어 “성폭력사건 해결과 관련해 구체적인 요구와 해결 방안을 정리 중에 있으며, 그 결과를 곧 밝힐 예정이다. 집행위원회를 통하지 않는 입장은 인화대책위의 공식 입장이 아님을 밝힌다. 이는 일관성 있는 입장 및 피해자와 그 가족에 대한 상처를 최소화하기 위함이오니 부디 협조해 주시기 바란다”라고 말했다.
‘도가니’의 사회적 파장이 어디까지 이어질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주연배우 공유가 인터뷰에서 “이 영화로 사회의 어떤 것이 갑자기 확 바뀌길 기대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관객 한명 한명의 인식이 바뀌고, 그게 모아진다면 뭔가 이뤄지지 않을까 생각한다”라는 말은 이제 유효함을 넘어 실현되고 있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유명준 기자 neocross@kukimed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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