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 영화] 영화 제목이 주는 선입견이 있다. 타이틀을 다는 입장에서도 숱한 고심을 하겠지만, 영화를 보는 입장에서도 제목은 중요한 정보처다. 특히나 아무 것도 모르고 봤을 때의 신선함과 재미의 극대화를 위해 관람을 마칠 때까지 영화 관련 정보를 ‘외면’하는 관객에게는 더욱 그러하다. ‘초한지: 영웅의 부활’은 제목에 관한 여러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영화다.
처음 ‘초한지: 영웅의 부활’이라는 제목을 봤을 때, 자연스레 ‘삼국지: 용의 부활’이 연상됐다. 후자는 각광받아 온 유비, 관우, 장비가 아니라 조자룡에 새로이 주목한 영화로 지난 2008년 전국 관객 103만 명의 선택을 받았다. 흥행실패작이거나 졸작이었다면 비슷한 제목 구조를 띠지도 않았겠지만, 드라마와 액션이 고루 어우러진 수준작이었기에 ‘초한지: 영웅의 부활’에 대한 기대감을 키우기에 충분했다.
말했듯, 제목은 기대감뿐 아니라 선입견도 키운다. 어느 정도는 비슷한 유전자를 지니고 있을 것이라는 선입견. 하지만 ‘삼국지: 용의 부활’과 비슷한 영화이겠거니 생각했다간 낭패를 맛볼 듯하다. ‘초한지: 영웅의 부활’에는 액션이 없다. 드라마만 있다. 평민에서 황제가 된 유방을 위시해 피할 수 없는 라이벌이면서도 유방에게 한없는 아량을 베풀었던 항우, 그런 항우를 등지고 유방 편에 선 장군 한신까지 ‘영웅의 인간적 고뇌’에 집중한다. 인물의 심리에 카메라를 깊이 들이대고자 하는 영화에서 중국 전쟁영화와 영웅영화의 고전적 액션문법을 답습할 필요는 없었으리라.
제목이 준 기대감과 선입견을 배제하고, 영화에만 집중한다면 ‘초한지: 영웅의 부활’은 수작이다. 한 시대를 풍미한 영웅, ‘용의 아들’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비구름을 몰고 다니기도 멈추기도 할 정도의 ‘하늘이 허락한 황제’, 그 이면(裏面)의 유방에 초점을 맞췄다. 천하의 주인이 되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힌 유방이 인간미와 의리, 명분을 갖춘 귀족 항우에게 느꼈을 열등감, 세상을 얻었으나 악몽에 시달리는 심약한 늙은이가 된 유방이 젊고 패기 있는 한신에게 느꼈을 역모의 불안감을 역사적 상상력으로 생생하게 포착했다.
주인공 유방 역을 맡은 배우가 유엽이라는 사실을 눈여겨본 관객이라면 영화의 아우라를 짐작할 수도 있겠다. 장동건 주연의 ‘무극’(2005)에서 유엽은 북공작(사정봉) 수하의 자객 ‘검은 늑대’로 등장한다. 줄거리 소개에 한 줄도 나오지 않는 작은 배역이지만, 우수에 찬 눈빛과 섬세한 표정으로 북공작의 ‘손발’로 살아야 하는 비애를 사실감 넘치게 표현해 찬사를 받았다. 이후 깊이 있는 심리 연기의 대표주자가 된 그에게 맡겨진 유방, 호기에 찬 영웅이기보다 두려움에 몸서리치는 인간으로 그려진 것은 당연한 결과다. 진나라 왕궁이 유방의 마음속에 열어젖힌 욕망의 문, 인간의 나약함 위에 건설되는 욕망의 제국이 맞이하게 되는 비운의 운명을 유엽보다 처절히 표현할 배우를 떠올리기란 어렵다.
그렇다면 관객의 낭패감은 누가 책임져야 할까. 엉뚱한 기대감을 키워 실망감으로 연결시키는 국내 개봉용 제목을 단, 수입사(영화사 폴) 등 관계자들에게 책임을 묻고 싶다. 일단 보러 오게 하는, 흥행의 열망을 담은 제목도 필요하겠지만 일단 보고 난 후, 삽시간에 번지는 입소문 또한 중요하다. 영화의 원제는 ‘王的盛宴’(왕의 성연·왕이 베푸는 성대한 연회)이고, 영어식 제목은 ‘The Last Supper’, 최후의 만찬 정도이다. 제목에 담긴 뜻은 영화를 직접 본다면 고개가 끄덕여질 것이다. 보고나서 곱씹어 보니, 무시무시한 핏빛 반전이 느껴져 서늘하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홍종선 기자 dunastar@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