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 연예] 이런 농담이 있다.
조선 숙종 임금의 빈(嬪) 장옥정(장희빈·1659~1701)이 숙종으로부터 사약을 받을 때의 상황을 설정한 유머다.
숙종은 세자 때 장옥정의 미색에 반했다. 그리고 왕이 된 후 장옥정을 왕비로 책봉했다. 인현왕후를 폐위시키고 말이다. 그 뒤로 숙종은 무수리 최씨(훗날 숙빈이 된다)에 빠져 장옥정을 멀리하다 ‘밀고 사건’을 계기로 장옥정에게 사약을 내린다. 장옥정은 왕비에서 희빈으로 강등된 것도 혀를 깨물 일인데 사약이라니…. 유머의 배경은 사약을 받는 궁궐 마당이다.
“마마 정녕 소녀를 버리시나이까? 제가 어떻게 섬겼는데 저를 내치시이니까?”
사약을 앞에 놓고도 장옥정은 숙종이 진정으로 자기를 사랑했음을 믿고 싶었을 것이다. 왜냐면 숙종은 자신을 너무나 사랑해 어머니(명성왕후)의 반대 뜻을 거슬렀고, 본처를 내쫓을 정도의 로맨티스트라는 믿음에 흔들림이 없었다.
유머에서 숙종은 슬픔을 가누지 못하고 사약을 앞에 둔 장옥정에게 다가간다. 옥정은 그가 한마디만 하면 누명을 벗고 명예를 회복하는 것은 물론 사랑도 되찾는다는 생각에 숨이 멎을 만큼 긴장한다. 숙종이 그런 장옥정 앞에 허리를 굽혀 다가가 귀엣말을 한다.
“원샷~”
장옥정은 ‘악녀’가 아닌 권력에 희생된 불쌍한 여자 일뿐
오는 8일 SBS드라마 ‘장옥정, 사랑에 살다’가 첫회가 방영된다. 인터넷 상에선 장희빈역을 맡은 김태희의 스타성 때문인지 드라마와 관련된 내용 하나하나가 화제다. 1961년 드라마(영화)의 1대 장희빈이었던 김지미를 시작으로 남정임 윤여정 이미숙 전인화 정선경 김혜수 이소연 등에 이은 9대 장희빈이 김태희다. 누가 됐든 미색으로 남자 홀리는 천하의 악녀여야 했다. 시청자들 입에서 “못돼 쳐 먹은 년”이란 소리 나오면 성공이었다.
‘장옥정, 사랑에 살다’는 그간의 정통 드라마와 좀 달리 ‘퓨전 사극’을 지향하고 있다. 여기서 숙종의 사랑을 차지하기 위해 계략과 음모로 살아가는 장옥정, 인현왕후(홍수현 분), 숙빈 최씨(한승연)는 사실(史實)에 근거한 역사 속 인물이다.
그런데 ‘원샷’으로 희화화되어 회자되는 인물 숙종(이순)을 미화시킬 우려가 다분히 있는 드라마가 ‘…사랑에 살다’이다. 한낮 척족을 위한 권력욕의 화신인 민비를 뮤지컬 ‘명성황후’가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국모로 만든 것처럼 말이다. 프로그램 정보에 나타난 숙종은 프랑스 루이 14세의 통치철학을 가진 조선의 성군으로 그려져 있다. 강력한 왕권을 구축한 조선 최강의 절대 군주라는 것이다.
이러한 콘셉트는 드라마의 유통 환경이 급격하게 바뀌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모바일 ‘내려받기’ 등을 통해 드라마를 즐기는 시청자가 늘어나면서 그들의 욕구에 부합하는 드라마 숙종 캐릭터가 필요했을 것이다. ‘숙종’보다 휘 ‘이순’을 강조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이에따라 ‘숙종과 장희빈’ 간의 흡입력 강한 러브 스토리, 역사 외전적인 성군 숙종 캐릭터가 핵심이 됐다.
부끄러운 ‘당쟁’의 장본인, 숙종을 성군으로 만든다면…
그런데 아무리 드라마라 하더라도 역사의 중심 인물을 왜곡 시켜선 안된다. 예를 들어 중인 출신 장옥정을 천민처럼 그려낸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또 그녀를 침방, 즉 요즘 개념으로 디자이너 캐릭터로 소화하는데 정작 침방 일은 한 건 무슬이 출신 숙빈 최씨였다. 이 또한 역사를 이해하는데 아무런 방해가 되지 않는다. 그들은 역사의 주변 인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숙종은 역사 기술에 있어서 주역이다. 대동법을 실시했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후 토지사업을 추진해 보완했다. 반상회와 같은 오가작통법을 실시했고, 금위영을 설치하여 5영 체제를 완결한 인물이기도 하다. 군사력 강화는 외척과 자신을 지지하는 당파를 지키기 위한 노력이었지만 말이다.
숙종 재위 시 당쟁이 최고조에 달해 조선 망국의 원인이 됐다. 서인과 남인, 노론과 소론 등으로 지칭되는 뿌리 깊은 당쟁으로 같은 당파가 아니면 혼인도, 왕래도 아니 했을 정도다. 옷 입는 방식까지 달랐고, 부모 자식 간도 의를 잘랐다. 그의 아들 영조와 손자 정조가 탕평책을 추진한 것도 숙종의 실정과 무관하지 않다.
심하게 표현하자면 탐욕한 군주 숙종이 여색을 위해 당파 줄타기를 하면서 장희빈이라는 ‘악녀’가 탄생했다. 장희빈은 출세를 위해 남인 세를 얻으려 했다. 사리분간 못하는 숙종 때문에 송시열 등 수백명의 석학이 사약을 받아 인재 풀이 바닥난 시대이기도 했다. 궁궐 안에서도 중전, 후궁, 대비, 대왕대비 심지어 무슬이 같은 궁녀까지 당쟁에 몰아넣고 사약을 받게 한 주체가 숙종이다. 국정철학을 갖춘 인물이 아니라 판단력을 잃은 무자비한 통치자였을 뿐이다.
한데 ‘권력에 살다’의 주인공인 숙종이 역사를 배우는 젊은이들에게 성군이 되어 뮤지컬 ‘명성황후’처럼 왜곡된다면 가득이나 역사 공부에 소홀한 학생들에게 독이 아닐 수 없다. ‘원샷’이라는 농담처럼 자신의 권력과 애욕을 위해 무자비했던 이가 숙종이다.
전정희 선임기자 jhje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