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 칼럼] 가수 싸이의 ‘젠틀맨’은 마당놀이를 즐기던 한국인의 유전자를 드러낸 곡이다. 판소리 흥부가의 놀부가 ‘롤 모델’이라도 되는 양 그의 캐릭터를 빼다 썼다.
우리나라 연희(演戱)의 특징은 신명이 넘치면 무대와 객석의 구분이 없어지는 것인데 그 바탕은 ‘저속함’에 있다. 질펀하게 노는 것이다. 좋은 말로 풍자와 풍류이다.
사실 유교적 신분사회는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공기(空氣)와도 같은 음담패설을 억눌렀다. 그리고 그 억누르는 주체인 양반은 상것과 구별을 위해 음담패설도 고취하게 드러냈다. 아마도 풍속화가 신윤복(1758~?)의 작품 ‘월하정인’에 나타난 남녀의 수작이 고취의 예일 것이다. ‘깊은 밤 달빛도 흐릿한데 두 사람의 마음은 두사람만 알겠지’라는 화제(畵題)는 서로의 욕망을 누루고, 또 누른 끝에 나온 문장이다. 싸이의 ‘젠틀맨’ 가사 대목이라면 ‘알랑가 몰라’로 대체할 것이다.
신윤복과 김홍도(1745~1806)는 이중적 태도를 보이는 양반이 얼마나 꼴사나웠으면 각기 ‘건곤일회첩’ ‘운우도첩’ 같은 춘화로 그들을 풍자했다. 아랫것들의 음담패설을 누르면서 정작 자신들의 욕망을 강화했던 ‘흘레 독점’에 대한 야유였다.
21세기의 노래 ‘젠틀맨’은 저속하다. 하지만 그 저속에는 비속어를 마음껏 구사하는 데서 오는 통쾌함이 있다. 기계음의 중독성은 저속 행위에 자신감을 부여한다. ‘용기 패기 똘끼’라는 음은 입안에서 똑똑 부러지며, 허세의 걸음걸이를 만든다. 춤추게 한다. ‘마더 파더 젠틀맨(mother, father, gentleman)’라는 단어도 개념이 아닌 단지 ‘소리’일 뿐이다. 그러면서도 ‘퍽 유’같은 상소리가 감춰져 있다. 싸이의 노래가 ‘B급 문화’라고 하는데 ‘문화’라는 말보다 ‘B급 놀이’라고 해야겠다. ‘누가 내 머리에 똥쌌어’와 같은 얘기를 들으며 낄낄거리는 ‘초딩’ 수준의 놀이라고 보면 된다.
‘젠틀맨’에서 노인들에게 쇼핑백을 들게 해 비서처럼 부려먹기, 러닝머신을 위를 달리는 여자에게 속도 높여 넘어지게 하기, 우아하게 커피 마시는 여성의 커피잔 툭 치기, 도서관서 공부하는 여성에게 방구 먹이기, 의자에 앉은 여성 의자 빼버리기, 비키니를 입은 여성 등에 오일을 발라주다가 수영복 가슴 끈을 풀어버리기, 아이들의 공을 빼앗아 멀리 차버리고 혼자 좋아하기 등의 장면은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ADHD) 아동과 같은 심술이다.
흥부가에서 놀부가 그렇다. 고추 밭에서 말달리고, 늙은 호박에 똥칠하고, 똥 누는 애 주저앉히고, 애 밴 부인 배통차고, 봉사 개천으로 인도하고, 불난데 부채질 하는 천하의 악동의 행위가 우리 가락으로 술술 나온다. 역시 중독성이 강하다. ‘젠틀맨’에서의 싸이 역시 마찬가지 캐릭터다.
문제는 ‘아리까리’(알 듯 모를 듯 하다의 속어)한 성적 표현이다. 여성에 대한 시선이 전반적으로 불편하다. ‘시건방춤’ 원조인 가인의 어묵 먹는 장면은 19금으로 ‘야동’에나 나올 법하다. 인내의 경계선을 넘나든다. 기술적인 아쉬움이 있다.
그런데도 ‘젠틀맨’은 15일 오후 현재 유투브 5000만뷰를 기록했다. ‘강남스타일’ 후속 곡이라는 호기심 때문인지, 빼어난 창작성 때문인지 속단할 순 없다. 다만 그 원전이 마당놀이에서 보여지는 우리나라 사람의 흥(興)과 욕망의 팽창을 극대화한 시키는데 탁월한 문화마케팅 기술이 접목됐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 받을 만 하다.
다만 어떻게든 ‘강남스타일’만큼은 가야한다는 조급증 때문이었는지 ‘비하’와 ‘외설’이 연희의 묘미를 가린다는 것이다. 싸이는 콘서트 직전 기자회견에서 “한국의 좋은 창작물을 해외로 가져가는 작업을 계속할 생각”이라고 했는데 ‘좋은 창작물’은 늘 ‘연희’가 앞서야 한다는 것이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전정희 선임기자 jhje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