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티즌은 영어 연설 자체를 놓고 정치적 성향에 따라 호불호가 갈린다. 이를테면 김대중 전 대통령의 영어연설도 거론되면서 말이다.
여기서 박근혜 대통령의 영어연설의 내용은 차치하자. 문제는 주권을 가진 한 국가의 정치지도자가 한 민족의 정신활동의 도구인 모어(母語)로 얘기하지 않은 것이 타당하느냐의 여부다.
대통령의 영어연설을 말하기 전에 영어와 관련된 우리의 현실을 정확히 인식해야 한다.
국제무대에서 국민 전체에게 이익을 주는 언어 사용은 한국어다
‘영어 헤게모니 사회’
이 말을 부정하기란 쉽지 않다. 영어에 주어진 특혜와 권력성 때문에 시민이 영어에 매달리게 만드는 숨은 힘을 말한다. 영문학자 김미경 교수(대덕대 교양과)는 “영어능력이 차별적으로 우대되고, 영어를 못하면 불이익을 받기 때문에 영어를 무조건 잘해야 한다는 생각이 널리 퍼지게 되면, 이것이 영어 헤게모니”라고 했다. 입시와 취업 과정에서 영어 중요도가 이를 잘 보여준다.
그렇다면 시민은 영어를 스스로 선택했을까? 김 교수의 결론은 정부의 시책과 행정기관의 정책, 정치지도자와 지식인 그룹이 지나치게 영어 헤게모니를 조장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입시와 취업 등에 영어시스템을 적용했기 때문이다. 국가는 국가와 국민 전체의 이익을 위해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한데 김 교수는 ‘국민 전체의 이익’은 한국어를 제대로 썼을 때 발생했음을 강조했다. 지난 2000년 동안 한반도는 한국어를 생활어로, 중국어와 일본어를 공식어로 사용한 이중언어 사회였는데, 이 이중언어 사회에서 국민은 법적 권리와 공적 생활을 유지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공적 언어를 쓸 수 없는 한국어 생활자가 자신의 권리를 찾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언어 계급인 셈이다.
당시 공식 언어였던 한문의 귀족성, 일본어의 제국성은 그 언어를 구사하는 소수 상위층이 정치와 경제를 독점하게 만들어 주는 권력의 도구로 활용됐다.
그러나 해방이 되고 한국어를 공식 언어로 사용하면서 모든 국민이 평등한 교육 기회를 누리고, 경제와 정치활동을 함으로서 급격한 비약을 할 수 있었다. 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2008년 현재 98.3%에 달하는 문해율이다. 일제강점기는 1.7%에 불과했다. 1945년 해방 당시 22.2%였다.
이중언어 사용에 따른 폐해를 들여다 볼 수 있는 한 사례가 한국 사회에 진출한 중국출신 동포(조선족)일 것이다. 그들은 한국어를 한다. 그러나 잘 알아듣지 못한다. 왜냐면 한국어 속에 섞인 외래어(영어 포함)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은 한국어를 쓰는데도 불구하고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누리기 쉽지 않다.
영어헤게모니의 중요성만 느끼게 하지 않았는지…
영어공용 국가인 필리핀은 전 국민의 7%만이 원활한 영어 의사소통을 한다. 1960년대 우리보다 GDP가 높았던 필리핀이었으나 2009년 현재 8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처럼 차이가 나기 시작한 건 한국이 공식 언어인 한국어 사용과 이를 바탕으로 정보 공유를 이뤄 민주화를 진행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국제사회에서 한국어의 지위는 어떨까? UN 세계지식재산권기구(WIPO)는 10개 공식어를 인정하고 있는데 여기엔 한국어도 포함됐다. 10개 공식어는 주로 유럽권 언어이고 중국어 일본어가 올라 있다. WIPO의 이같은 조치는 한국어가 공식 언어로 국제무대에서 인정받은 최초의 사례다. 점차 다른 분야에도 세계 공용어로 인정받아야 한국인들이 언어로 인한 불이익에서 좀 더 자유로울 수 있다.
언어학자들은 영어가 국제어가 아니라고 말한다. 수많은 공용어 가운데 하나라는 것. 따라서 우리가 외국인의 모어를 배려하는 것처럼 외국인도 한국어를 배려, 상호적이고 평등한 국제관계를 만드는 일이 중요하다.
김 교수는 “이를 위해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하는 문제는 우리 스스로가 한국어를 존중하는 것”이라며 “국제무대의 커뮤니케이션에서 우리에게 가장 유리한 언어는 한국어”라고 말했다.
어쨌든 국제무대에서 우리 대통령이 ‘수많은 공용어’ 가운데 영어로 말했다. 원활한 소통을 위한 일 이었겠으나 상호적이고, 평등한 국제 관계를 만드는 일에 바람직한 것인지 숙고해야 한다. 또 자국민에게 모어에 대한 자부심보다 영어 헤게모니의 중요성만을 느끼게 했다는 점에서 바람직하지 않다는 지적이 우세하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전정희 선임기자 jhje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