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기념식장서 박대통령이 남긴 것들>
[친절한 쿡기자] 제33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이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가운데 큰 사고(?) 없이 치러졌습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을 공식 지정할지를 놓고 정부와 관련단체 간 논란이 일었고 정부가 ‘제창’ 대신 ‘합창’이란 희한한 절충안을 제시할 땐 솔직히 실소가 터졌습니다. 그래도 대통령이 5년 만에 참석하는 기념식이기에 ‘불상사’가 없이 잘 치러진 것은 다행한 일입니다.
하루가 지났지만 아침에 출근해 박 대통령의 동선을 중심으로 5·18 행사를 꼼꼼히 읽어봤습니다. 그 중에서 ‘행불자묘역’과 ‘이팝나무’, 그리고 ‘태극기’가 눈길을 사로잡았습니다.
<朴, 행불자묘역서 “이분들 다 돌아가셨겠네요">
박근혜 대통령이 광주광역시 운정동 5·18 민주묘지에 도착한 것은 18일 오전 9시51분쯤이었습니다. 박준영 전남지사와 박승춘 국가보훈처장, 양희승 5ㆍ18구속부상자회장, 정현종 5ㆍ18민주묘지관리소장이 영접했습니다.
검은색 정장과 바지 차림의 박 대통령은 묘지 동편으로 입장해 정 관리소장의 안내에 따라 20m쯤 올라가 행방불명자묘역 표지석 앞에서 묵념 후 묘역을 둘러봤습니다. 정 소장이 이름도 없이 무궁화만 걸려있는 행불자 묘역에 대해 "아직 시신도 못찾았다"고 하자, 박 대통령은 "그땐 다 젊은 분들이었을텐데"라고 말했습니다. 이어 정소장이 "이 일대 묘역이 다 행불자"라고 덧붙이자 박 대통령은 묘를 쓰다듬으면서 "그럼 다 돌아가셨겠네요"라고 혼잣말처럼 되뇌이었습니다. 행불자는 일정기간이 지나고 가족이 동의하면 법적으로 '사망' 처리되는 걸 모를리 없을 박 대통령이 33년이 지난 지금 새삼 이들의 사망을 언급한 것은 5·18 희생가족들의 회한을 감정이입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묘역에 핀 5월의 꽃 ‘이팝나무’…박 대통령 “나도 좋아해”
박 대통령은 기념식장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정 소장에게 “유족들이 어디 앉아 있어요?”라고 물었습니다. 일부 5ㆍ18단체들이 불참을 선언하면서 유족들이 소복을 입지 않고 평복을 입고 와 뒤편에 앉아있었으니 눈에 띄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어 기다리고 있던 강운태 광주시장, 박준영 전남지사으로부터 5·18 민주묘역이 부족해 제3묘역이 필요하다는 의견과 대구시장ㆍ대구시의회의장 등이 참석한 배경 등을 청취했습니다. 그리고 진입로에 활짝 핀 이팝나무에 대한 대화가 오갔습니다.
보도 내용에 따르면 박 대통령은 5·18 묘지 진입로에 이팝나무가 활짝 피어 있는 것을 목격하고 강운태 시장에게 "이팝나무가 좋은 데 참 잘 가꾸어져 있네요"라고 말을 건넸습니다.
이에 강 시장이 "임명직 시장 시절(1995년) 5월을 상징하는 나무가 없는가 고민하다가 전국적으로 5월에 꽃을 피우는 이팝나무를 진입로에 심었다"고 하자, 박 대통령은 "참 잘하셨다. 이팝나무를 좋아한다. 이번 식목일에도 청와대 경내에 이팝나무를 심었다"고 소개했습니다.
강 시장은 "대통령께서 좋아하시는 이팝나무와 5월을 상징하는 이팝나무가 일맥상통하니까 그 정신을 함께 기리고 그런 뜻을 언젠가 대통령께서 5월 유공자들에게 말씀을 하시면 크게 기뻐할 것 같다"고 화답했습니다. 박 대통령과 5·18정신을 연결지으려는 강 시장의 아전인수를 어떻게 해석해야할까요.
<합창도, 제창도 남김없이~태극기만 나뿌껴~>
박 대통령은 정확히 오전 10시에 기념식장에 입장했습니다. 기념식장에는 양희승 5ㆍ18구속부상자회장, 박준영 전남도지사, 강운태 광주시장, 박승춘 보훈처장, 황우여 새누리당 대표, 김한길 민주당 대표, 노회찬 진보정의당공동대표, 현오석 경제부총리, 유정복 안전행정부 장관, 뒷 열에 앉은 김범일 대구시장, 김문수 경기도지사, 안희정 충남도지사, 김무성 새누리당 국회의원, 안철수 무소속의원, 정세균ㆍ박지원 민주당 전직 대표 및 원내대표 등 민주당 의원들이 먼저 와 있었습니다.
국민의례와 헌화, 분향, 경과보고에 이어 박 대통령은 기념사를 낭독했습니다. 기념사에서 박 대통령은 ‘국민통합’을 거듭 강조했습니다. 그는 "민주주의의 큰 진전을 이뤄냈지만 계층간, 지역간, 세대간 갈등의 골은 메워지지 않고 있다"면서 "새로운 미래를 열기 위해서는 지역을 넘어, 아픔을 넘어, 대한민국의 역동적 발전을 위해 다같이 힘을 모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박 대통령은 "5·18 정신이 국민통합과 국민행복으로 승화돼야 한다", "앞으로 정부는 국민통합과 국민행복의 새 시대를 열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겠다", "각계각층의 서로 다른 생각들을 하나로 모아 국가발전의 새로운 동력으로 삼겠다"라는 등 '국민통합'의 의지를 수차례에 걸쳐 강하게 피력했습니다.
기념사가 끝난 뒤 뿌리패예술단의 공연 이후 서울로얄심포니 오케스트라와 인천 오페라합창단이 협연한 ‘임을위한행진곡’ 합창이 이어졌습니다.
‘임을 위한 행진곡’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 데 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민주당 의원들과 유족들이 먼저 일어나서 태극기를 흔들며 노래를 따라 불렀습니다. 그러자 박 대통령을 비롯한 참석자들이 모두 기립했습니다.
김한길 민주당 대표, 김문수 경기지사, 안희정 충남지사, 김범일 대구시장, 강운태 광주시장, 박준영 전남지사 등이 자리에서 일어나 제창했으며, 특히 노회찬 진보정의당 공동대표는 처음부터 끝까지 주먹을 쥐고 흔들며 노래를 불렀습니다. 대통령 옆자리에 앉은 황우여 새누리당 대표는 제창에 참여했습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따라 부르진 않았습니다. 국민의례 순서에서 애국가를 따라불렀던 것을 보면 의도적 침묵으로 보여집니다. 대신에 박 대통령은 태극기를 흔들었습니다.(위 사진 참조) 여기에는 강운태 광주시장의 ‘간곡한 부탁’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보도가 있습니다.
광주시 등에 따르면 강 시장은 이날 오전 광주공항에 도착한 박 대통령에게 '독대'를 요청해 공항 귀빈실에서 잠시 자리를 함께 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강 시장은 "광주시민은 박 대통령이 5·18 기념식에 참석하는 것을 환영한다"며 ‘임을위한행진곡’을 둘러싼 논란을 설명한 뒤 "대통령께서 기념식장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이 불릴 때 태극기를 들어주시면 국민대통합에 기여하실 것"이라고 부탁했습니다. 이어 강 시장은 "제가 태극기 2개를 준비하겠다"며 "하나는 대통령 것이며, 또 하나는 제 것"이라며 박 대통령이 임을 위한 행진곡에 동참해 달라고 거듭 요청했습니다. 이에 박 대통령은 아무런 답변을 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이후 박 대통령은 기념식장에서 ‘임을위한행진곡’ 합창 공연이 있자 강 시장에게 시선을 줬고 강 시장은 미리 준비한 태극기를 박 대통령에게 건넸다는 것입니다. 강 시장의 작전(?)이었지만 박 대통령은 합창도, 제창도 아닌 태극기를 나부끼는 기지를 발휘함으로써 국민통합의 새 날이 올 때를 고대한 것일까요. 국민일보 쿠키뉴스 정재호 기자 jhjung@kmib.co.kr
제33주년 5ㆍ18 민주화운동 기념식 행사 스케치
- 장소 : 국립 5ㆍ18민주묘지(광주광역시 북구 운정동)
- 참석자
o 국가보훈처장 및 국ㆍ실ㆍ과장, 보훈단체장 및 관련 인사, 광역단체장, 기초단체장, 지방의원, 5ㆍ18기념재단, 5ㆍ18단체장, 5ㆍ18민주유공자 및 유족, 학생 및 시민대표, 정당 대표 및 관계자, 국회의원, 장ㆍ차관급, 정부 산하 단체장 등
o 청와대 : 비서실장, 정무수석, 외교안보수석 등
< 스케치>
- 09:51 박 대통령, 묘지 동편 유영봉안소 앞 도착. 박준영 전남도지사, 박승춘 국가보훈처장, 양희승 5ㆍ18구속부상자회장, 정현종 5ㆍ18민주묘지관리소장이 영접
- 강운태 시장 : 양 회장님이 병원에 계신데 기념식 참석을 위해 오늘 오셨습니다.
- 양희승 회장 : 4년 전 기념식 때 뵙고 다시 여기서 만나 뵙게 돼 반갑습니다.
▲ 박 대통령 : 감사합니다.
( 정현종 소장에게)고생 많으시네요.
- 정현종 소장 : 감사합니다.
- 09:55 검은색 정장과 바지 차림. 묘지 동편으로 입장 후 20미터쯤 올라가 행방불명자묘역 표지석 앞에서 정현종 소장의 안내에 따라 경례와 묵념 후 묘역을 둘러봄
- 이어 행방불명자묘역 순례에 나서 고(故) 임옥환 님의 묘비를 어루만진 뒤 차례로 둘러 봄
- 정 소장이 각각의 사연(임옥환 님의 경우 17세에 절에서 기거하다가 귀향하던 도중에 행방불명 됐다 등)을 전함
▲ 박 대통령 : 이 분들은 모두 돌아가셨겠죠?
- 정 소장 : 그런 걸로 알고 있습니다.
▲ 박 대통령 : (기념식장으로 자리를 옮기며)유족들이 어디 앉아 있어요? (이날 유족들은 일부 5ㆍ18단체들이 불참을 선언해 소복을 입지 않고 평복을 입고 와 눈에 띄지 않았음)
- 정 소장 : 저 뒤에 앉아 있습니다.
- 이어 기다리고 있던 강운태 광주시장, 박준영 전남지사와 묘역 부족 제3묘역 필요성, 대구시장ㆍ대구시의회의장 등 참석 의미(달빛동맹 차원 : 대구 달구벌-광주 빛고을), 진입로 이팝나무 식재 관련 등에 대해 대화
- 10:00 박 대통령, 5ㆍ18 민주화운동 기념식장에 입장
- 앞 열에 있는 인사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눈 뒤 자리에 착석
- 기념식장 내 대통령과 함께 행사장 앞 줄에 앉은 참석자
( 왼쪽부터)양희승 5ㆍ18구속부상자회장, 박준영 전남도지사, 강운태 광주시장, 박승춘 보훈처장, 박 대통령, 황우여 새누리당 대표, 김한길 민주당 대표, 노회찬 진보정의당공동대표, 현오석 경제부총리, 유정복 안전행정부 장관 배석. (한 줄 건너 왼쪽부터)김범일 대구시장, 김문수 경기도지사, 안희정 충남도지사 등 배석
- 김무성 새누리당 국회의원, 안철수 무소속의원, 정세균ㆍ박지원 민주당 전직 대표 및 원내대표 등 민주당 의원들 참석
- 국민의례 후 헌화 및 분향, 5ㆍ18 민주화운동 경과보고 순으로 진행
- 10:14 대통령 말씀(기념사는 e춘추관 참조)
- 뿌리패예술단의 공연 이후 합창(임을 위한 행진곡). 민주당 의원들과 유족들이 먼저 일어나서 태극기를 흔들며 노래를 부르자 대통령을 비롯한 참석자들이 기립했고, 노래를 부르는 이들이 점차 늘어남
- 박 대통령, 김범일 대구시장, 김문수 경기도지사, 안희정 충남도지사 등과 일일이 악수하면서 퇴장 <끝>
< 제33주년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 기념사>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광주시민 여러분,
5.18 광주 민주화운동 33주년을 맞이하여 민주주의를 위해 숭고한 희생을 하신 영령들의 명복을 빕니다.33년의 긴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마음의 슬픔을 지우지 못하고 계신 유족 여러분, 그리고 광주시민 여러분께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가족을 잃고 벗을 떠나보낸 그 아픈 심정은 어떤 말로도 온전하게 치유 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저 역시 매번 5.18 국립묘지를 방문할 때마다 가족들과 광주의 아픔을 느낍니다. 영령들께서 남기신 뜻을 받들어 보다 더 성숙한 민주주의를 만드는 것이 그 희생과 아픔에 보답하는 길이라고 믿습니다. 앞으로 5.18 민주화운동의 의미를 되새기면서,우리나라를 더욱 자랑스러운 국가로 만들어 가겠습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광주시민 여러분,
산업화와 민주화의 고비를 넘어선 우리 앞에 지금 또 다른 도전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세계가 놀란 경제성장으로 국가는 크게 발전했지만 국민의 삶은 그만큼 행복하지 못합니다. 민주주의의 큰 진전을 이뤄냈지만 계층간, 지역간, 세대간 갈등의 골은 메워지지 않고 있습니다.
저는 이제 새로운 국가발전의 길을 열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양적 성장에서 질적 성장으로 경제발전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정치사회 영역에 머물렀던 민주화를 경제 분야로 더욱 확장시켜서 국가발전과 국민행복이 선순환하는 새로운 구조를 만들겠습니다. 그것이 우리 앞에 밀려오는 도전을 극복하는 길입니다.
그런 새로운 미래를 열기 위해서는 지역을 넘어, 아픔을 넘어, 대한민국의 역동적인 발전을 위해 다 같이 힘을 모아야 합니다. 저는 이제 5.18 정신이 국민통합과 국민행복으로 승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민주주의의 궁극적인 목적은 국민행복이고, 국민행복시대를 열어가는 것입니다.
앞으로 정부는 국민통합과 국민행복의 새 시대를 열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할 것입니다.각계각층의 서로 다른 생각들을 하나로 모아서 국가 발전의 새로운 동력으로 삼을 것입니다.
그 길에 민주화를 위해 고귀한 희생과 아픔을 겪으신 여러분께서 선도적인 역할을 해 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저는 여러분과 함께 국민행복의 새 시대를 열어가겠습니다.
5.18 민주화 운동의 날에 다시 한 번 민주영령 앞에 깊은 추모의 마음을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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