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김단비 기자] 히포크라테스 선서와 악마의 손

[현장에서/김단비 기자] 히포크라테스 선서와 악마의 손

기사승인 2013-09-09 10:41:00

“나는 인간의 생명을 수태된 때로부터 지상의 것으로 존중히 여기겠노라, 비록 위협을 당할지라도 나의 지식을 인도에 어긋나게 쓰지 않겠노라”

의사들의 맹세 <히포크라테스 선서>의 한 구절이다. 의사의 올바른 의료행위와 윤리를 강조했던 히포크라테스, 그가 지금 살아있다면 최근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초유의 사건(여대생 청부살해 사모님 사건)을 보고 과연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여대생 청부살해 사모님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이 사건의 주범 영남제분 사모님 윤 모 씨는 지난 2003년 당시 판사였던 사위 A씨의 불륜을 의심하고 그 상대로 이종사촌 관계였던 여대생 B씨를 자신의 조카를 시켜 살해를 했다. 윤 씨는 이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지만 유방암, 파킨슨병 등을 이유로 다섯 차례나 형집행정지 처분을 받았다. 무고하게 남의 자식을 살해하고도 아프다는 이유로 감옥을 가지 않게 된 것이다.

하지만 여대생 B씨의 유족은 윤씨가 거짓 환자 행세를 하며 병원 특실에서 호화스럽게 생활한다고 의혹을 제기했고 주요 방송사가 이 사건을 다시 다루면서 사건의 전말이 수면 위로 올라왔다. 조사 결과 영남제분의 회장이자 윤 씨의 남편인 류 모 회장(66)이 부인 윤 씨가 형집행정지를 받도록 세브란스병원 박 모 교수에게 1만 달러 이상의 돈을 주고 사주해 허위진단서를 발급받은 사실이 드러났다.

지난 9월 3일 살인교사를 묵인한 혐의로 류 회장과 주치의 세브란스병원 박 교수가 모두 구속됐다. 윤씨를 비롯한 공범들이 구속되면서 사건은 일단락 마무리는 되는 듯 보이지만 아쉬운 점이 많다.

윤씨는 거의 10여 개 과에서 진료를 받아 당뇨병, 우울증, 폐렴, 유방암, 파킨슨병을 앓고 있다는 진단을 받았다. 이런 진단이 나오기까지 협진이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 박 교수가 주치의 자격으로 최종진단서를 임의로 변경하거나 과장한 것일 수 있으나 정상인이 10여개의 거짓진단을 받기까지 주변인들의 의혹 한번 사지 않고 할 수 있었단 것이 가능한 일인가.

지난 6월 검찰이 박 교수 연구실 압수수색을 시작하자 그 다음날 연세대는 임시교원윤리위원회를 열어 박 교수의 진단서 발급 경위와 허위 여부를 조사하기로 했었다. 하지만 그 후로 연세대나 세브란스병원이 새롭게 밝혀낸 사실이나 징계한 사실은 전혀 없다. 어느 기관보다도 의학적인 전문지식을 토대로 사실 관계를 명확하게 할 수 있었음에도 직접조사는 고사하고 불똥을 맞지는 않을까 몸을 사리는 형국처럼 보였다.

진단서는 의사 고유영역의 것이다. 의료 전문의만 쓸 수 있기 때문에 그만큼 파워가 세다. 형집행정지나 구속집행정지를 결정하는데 주요 문서가 되는 이유다. 일반인들은 물론 법조인들조차도 진단서를 파악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의사 스스로 신뢰를 지키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이번 박 교수 수사에 대해 연세대와 세브란스병원 측이 보인 미지근한 일처리는 의사와 병원의 권위와 신뢰를 스스로 추락시키는 일이었다.

무고한 한 사람을 죽였다. 하루아침에 사랑하는 딸을 잃은 피해자 가족들과 이 땅에 딸을 키우는 부모들은 모두가 분노했다. 전문가의 지식을 이용해 힘 하나 안들이고 법의 테두리를 빠져나가는 일은 두 번 다신 일어나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는 의사를 믿는다. 아니, 그들이 외치는 선서의 내용을 믿는다. 연세대학교 세브란스 병원 로비에 가면 이런 말이 써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류를 질병으로부터 자유롭게”

kubee08@kukimedia.co.kr
김단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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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단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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