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정희의 시사소설] 성남보호관찰소, 집권당 헤게모니 투쟁으로 비화

[전정희의 시사소설] 성남보호관찰소, 집권당 헤게모니 투쟁으로 비화

기사승인 2013-09-11 00:08:01


[전정희의 시사소설 ‘조선500년 익스트림’] 성남보호관찰소, 집권당 헤게모니 투쟁으로 비화

진녹색 쓰개를 걷어내자 한 여인의 육신이 엎어져 있었다. 역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여인의 엉덩이는 아이를 낳아 본적 없는 처녀인 듯 달항아리처럼 선이 고왔다. 9월 더위에도 마치 산사람 피부 마냥 깨끗했다.

광주유수부 의녀 권송파는 냄새를 참고 시신을 뒤집었다.

“으윽…”

권송파가 주춤했다. 시신 얼굴이 뽕나무 오디로 새카맣게 발라져 있었다. 누군가 오디를 짓이겨 발라 놓았다. 광주유수부 내 성폭행 사건은 올 여름 들어 여섯 번째 발생했다.

유수부 관내 내곡리(현 서울 내곡동)에서 봉은사로 불사에 나섰던 한 여인이 헌인릉 인근 논두렁 가에 처박혀 발견된 것이 그 첫 번째였다.

내곡동 사저 측, “강남·분당 이권을 지켜라”

내곡리는 안동김씨 좌장 김좌근이 고령으로 더는 세도를 이끌기 힘 들자 별장을 지어 칩거한 반가촌이었다. 김좌근은 순조, 헌종, 철종 임금을 걸쳐 권력을 유지하면서 영의정만 세 번 역임했다. 그가 내곡리에 자리를 튼 것은 태종, 순조가 묻힌 헌인릉에 자신도 들어가야 한다는 무언의 시위였다.

그는 아들 김병기에게 “내가 죽거든 헌인릉 묻고 능 이름을 명릉(明陵)이라 칭하라”고 말하곤 했다. 세 임금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상왕 아닌 상왕을 해온 김좌근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순조의 국구(장인) 김조순 이래 당파조차 없애고 세도정치(유신독재 격)를 시작한 안동김씨 가문이었다.

김좌근이 광주유수부 관내 내곡리 별장을 고집한 또 다른 이유는 남한산성이 행궁이었기 때문이다. 임금이 머물 수 있는 조선 4대 유수부(청남대 격)가 광주 수원 강화 개성이었으나 광주 행궁은 창덕궁에서 가까워 임금의 원행이 잦았다. 광주유수부는 남한산성 남쪽(지금의 분당)과 서쪽(서울 강남·서초·송파구)등을 포함해 관할했다.

따라서 광주유수부는 대신들이 원하는 제일의 임지였다. 행궁을 관리해야 임금 눈에 들 수 있었고 그래야 삼정승될 기회가 생겼다. 뿐만 아니라 송파나루와 광나루만 건너면 바로 도성에 닿는다는 편리성도 작용했다. 한나절이면 도성 대신들과 풍류회를 가질 수 있는 있었다.

하나 또 있었다. 송파나루와 광나루에 형성된 장터 상권은 정파를 위한 자금 마련에 좋았다. 남한강과 북한강을 오르내리는 세수선과 상선도 광주유수부가 점고했다.

신흥 부촌, 강간범 등 조직폭력배 들끓다

내곡리에 김좌근이 경화세족으로 자리를 잡으면서 송파와 광나루가 더욱 커졌다. 검계(조폭)들 간에 세력 싸움도 잦아졌다. 먹을 것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 상권을 둘러싼 검계 간 다툼 배경에는 판교반가 이씨가문과 분당반가 전씨가문이 있었다. 이 두 반가는 산성리(성남 구도심 격)에 있는 유수부 관아와 거리를 두고 불필요한 마찰을 피해오던 터였다.

두 반가는 몇 년 전 김좌근의 내곡리 사저를 연합해 끌어들이면서 송파와 분당·판교를 잇는 경강 이남 제일의 부자 향촌 역사(役事)에 나섰다. 탄천은 비옥한 농토의 젖줄이 됐고 그 탄천이 경강(한강)과 만나는 송파나루는 손꼽는 조창(漕倉)이 됐다. 백성 간에는 김좌근이 청계천 준설공사를 통해 모은 큰 돈을 송파 상권에 퍼부어 수백 배의 이익을 남겼다는 얘기가 떠돌았다.

그 송파 조창을 중심으로 양 반가는 치열하게 다투기 시작했다. 무뢰배까지 동원하며 세를 겨루게 됐다. 한데 천하의 잡것들이 모이다 보니 송파(지금의 강남) 일대는 성폭행, 살인, 조직폭력 사건이 끊이지 않았다.

‘모이면 도적이고 흩어지면 백성이다’라는 말은 광주유수부에서 처음 흘러나와 팔도에 퍼졌다.

당연히 치안이 뒤따라가지 못했다. 광주유수 이성남이 좌당인 남인 시파여서 외척 세도인 벽파(집권당) 조정에 씨도 안 먹혔다. 유수가 의견을 내도 협력을 하지 않았다.

“전하, 송파나루를 중심으로 강상의 도를 무너뜨리는 끔찍한 범죄가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오죽하면 모이면 도적, 흩어지면 백성이란 말이 송파에서 생길 정도이겠습니까. 청하오 건대 경포(京捕)를 파견하여 성폭행 등을 일삼는 무뢰배를 일망타진케 하여 주옵소서.”

이성남의 이러한 탄원에도 불구하고 도적과 강도의 기세는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았다.

성남 구도심과 신도심의 정치역학

그 무렵 조정은 매관매직과 삼정문란, 서학 유입에 따른 사화 등으로 한양 서린방 전옥서 수감자가 차고 넘쳤다. 홍경래 난 여파가 계속돼 헌종, 철종대에 이르러서도 민란이 계속됐다. 역모자와 야소교 죄인, 강도와 잡범 등으로 골머리를 앓았다.


철종 4년. 병조판서 김상득이 아뢨다.

“전하의 성은이 온 세상에 비추고 있으나 좌당 잔당 등이 무고한 백성을 해코지하고, 종(從)서학을 일삼는 무리들이 혼음(남녀칠세부동석에 반함)하는 관계로 그 폐가 민란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는 형국이옵니다. 이에 전옥서 원옥이 죄수로 넘쳐 이 죄수들을 왕도에서 격리해야 하옵니다. 그러 하오면 대규모 원옥이 필요하온데 그 최적지가 도적이 들끓는 광주유수부인 줄 사뢰옵니다.”

이에 국구이자 영의정인 영은부원군 김문근이 “험험” 잔기침을 하며 철종에게 허락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리하시오.”

철종이 윤허했다.

그렇게 도성에서는 조선 최대 형행 시설 계획이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광주유수 이성남은 눈치도 못 채고 경포 파견만 주장하고 있었다.

연이은 성폭행 사건, 분당 강남서 집중

두 번째 성폭행 피해자 시신은 송파나루 조창 볏섬 사이서 발견됐다. 역시 새카만 오디가 여인네 얼굴에 칠해져 있었다. 그 여인 역시 장옷에 덮여 있었다. 버려진 노란색 저고리엔 사내의 정액이 묻어 있었다.

세 번째 피해자는 여덟 살 계집아이였다. 서현역말 근처 집 안에서 당한 모양인데 참혹해 차마 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권송파는 격간도동(정신병)이 있는 자가 아니고서는 이렇게 잔인할 수 없다고 보았다.

구월 초하룻날, 산성 내 좌승당에서 당직을 서던 검률에게 양민 노파가 찾아왔다. 자진한 딸년과 손녀의 억울함을 풀어달라는 호소였다. 사연 인즉 사위가 역병에 들어 오늘 내일 하여 모녀가 청계산 서낭당을 찾아 빌던 중 성폭행을 당했고, 차마 부끄러워 당나무에 목을 매 죽었다는 것이다.

검률은 즉각 판관에게 보고하고 다른 검률 네 명, 의녀 권송파와 함께 청계산 현장으로 갔다. 현장에서 관아까지는 삼경쯤 걸리는 먼 길이었다. 반면 내곡리 사저에서는 코앞이었다.

“나리, 이 늙은 년이 불쌍한 내 딸과 손녀의 참혹한 모습을 보고 엎어지고 구르며 저 앞에 사저로 달려가 호위하는 군사에게 도움을 요청하였으나 사저 호위 때문에 도와줄 수 없다며 일언지하 거절당하였사옵니다. 그들이 거하기만 하여도 달아나던 강도들을 잡을 수 있었사옵니다. 이런 억울한 일이 어디 있사옵니까? 경포에게는 도성 안 백성만 백성 이옵고 도성 밖 백성은 이리 흉한 일을 당하고 죽어도 된다오니까?”

범죄자 관리처를 왜 굳이 강남·분당에?

노파의 얘기에 권송파가 울며 시신을 수습하였다. 권송파가 울먹이며 말했다.


“판관 나리. 광주유수부 내에서 연이어 발생하고 있는 성폭행 살인사건은 범인이 피해자들에게 오디 칠을 하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송파 인근 뽕밭 잠실과 무관하지 않은 듯싶습니다.”

판관이 고개를 끄덕이며 받았다.

“정탐한 바에 따르면 유수부 관내 사건이 조정에 보고 되고 있다는 것이네. 한데 유독 성폭행 사건이 광주유수부에서 집중적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것은 뭔가 음모가 있다고 보네. 도성 전옥서엔 강상의 죄를 묻는 죄인들만 가두고, 살인범과 강간범 등은 광주유수부 내에 제2 전옥서를 만들어 수용한다고 하더군. 그러자면 광주유수부와 경기도 관내에서 끊임없이 범죄가 일어나고 있음을 입증해야 하는데 이것이 ‘오디 성폭행 살인’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이야. 민심을 부추겨 광주유수부에 전옥서를 반드시 설치하려는 계획인거지.”

판관 얘기에 검률 하나가 끼어들었다.

“그렇다면 김좌근 영감과 판교 이씨가문, 분당 전씨가문이 가만히 있을까요? 유수부 내 능답과 골답은 죄다 그들 차지이고 송파 조창 하역권과 객사 운영권 등도 그들 것이 온데 혐오 시설인 전옥서가 온다면
결코 가만히 있을 위인들이 아닐 것입니다.”

“이 사람아. 자네는 세상이 그렇게 맹물인줄 아나? 지금 형조 판서가 광주 곤지암 반가 김수근 아닌가? 같은 안동김씨라 하더라도 신권력 김문근에 선을 대고 있는 게 김수근이네. 김좌근은 이제 지는 권력이야. 전옥서가 이곳에 들어오면 능답이든 골답이든 값이 떨어져 다랑이답 가격이 되고 말아. 김수근이 이를 노리는 거네. 값이 떨어지면 태재고개 넘어 들어와 이곳 상답(上畓)을 싼 가격에 사 버릴 작정인 게지. 따라서 민심 흉흉하게 만드는 게 그의 목적이야. 이 계획을 판교와 분당 양가가 아직 모르고 있는 거네.”

성범죄자 등 관리 기관 입주 놓고 법무부 우왕좌왕

그해 한가위 밑이었다. 서현역말에서 송파나루에 이르는 백성이 서현역말에 모여 시위를 벌였다. 뒤늦게 신권력의 의도를 알아챈 양 반가와 내곡리 사저 측에서 전옥서 이전 반대 시위에 나섰다. 특히 경기향교, 이매서원 등 관학, 사학 자녀를 둔 반가 부모가 격분했다. 이들이 격분하자 서당에 학동을 보내는 중인, 양민 부모도 뒤따라 나섰다. 그 수가 3000여명에 달했다.

이들은 학동을 등교시키지 않고 서현역말 인근 전옥서 터로 집결시켰다. 병조 판서는 즉각 이를 민란으로 보고 이성남을 파직하라고 대신들 앞에서 으름장을 놓았다.

“삼전도의 굴욕이 바로 좌당 때문에 일어난 지가 엊그제 이온데 그 남한산성 행궁 백성이란 자들이 시위를 한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옵니다. 모두 좌당 유수의 영향이옵니다. 이 자를 파하고 유배에 처하소서!”

그런데 집권당 경기관찰사 김문새의 장계는 "조정 대신들의 오판"이라며 "광주 전옥서 설치계획을 백지화하라"고 촉구했다. 강남, 분당, 판교는 수원 화성 조성과 같은 읍성 건설 이권이 물려 있는 곳으로 집권당의 텃밭인데 쓸데없는 전옥서는 왜 그곳에 세워 굴러온 복을 깨박 놓느냐는 것이었다.

뒤늦게 사태를 알아챈 병조, 공조, 형조 판서는 승정원(대통령 비서실)에 불려가 대책 회의를 가졌다. 형조판서 김수근은 자신의 속내를 애써 감췄다. 쥐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우게 된 꼴이 될 듯싶어서였다.

“일단 전옥서 축조를 철회하세. 김좌근 대감과 두 반가 저항이 만만찮네.”

승정원 도승지 얘기에 김수근이 반론을 폈다.

“그러면 서학쟁이, 강도강간범, 검계 일당들을 어디다 수용합니까? 양반 사는 동네 어디인들 전옥서를 수용하겠습니까? 역향이나 좌당 지역에 설치하여야 하온데 만만한 곳이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그 혼란의 책임을 서로 묻지 않았다. 김씨 가문의 삼촌이고 조카 관계였기 때문이다.

경기도지사, 대통령 만나겠다

구월 아흐레였다. 광주유수부의 검문검색 강화에도 또 성폭행 사건이 발생했다. 일곱 번째였다. 잠실 경기향교에 자식을 유학시킨 광주 초월리 반가의 젊은 부인이 성폭행 당한 뒤 오디를 뒤집어 쓴 채 향교 담벼락 시궁창에 버려져 있었다.

이 소문은 삽시간에 퍼졌다. 여인네들이 특히 분을 참지 못했다. 그들은 도성으로 몰려가자며 아우성 쳤다.

그럼에도 조정은 이렇다할 대책을 내놓지 못했다. 영의정이 나서 “전옥서를 서현역말에 세우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했으나 반가 부모들이 믿지 않았다.

사태가 이리 돌아가자 지켜보던 경기관찰사 김문새는 입궐을 준비했다. 김문새는 정치역학에 따라 영의정이 될 인물이었다.

그가 나선 것은 제2, 제3의 전옥서 터를 지정한다 한들 경기도가 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이제 전옥서 문제는 김씨가문 권력자 간의 내분으로 치닫고 있었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전정희 기자·시사소설 작가 jhjeon@kmib.co.kr



[전정희의 인기 시사소설 ]


전정희 기자
jhjeon@kmib.co.kr
전정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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