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정희의 시사소설] 13일의 금요일 검찰총장 파면…김해 귀향

[전정희의 시사소설] 13일의 금요일 검찰총장 파면…김해 귀향

기사승인 2013-09-13 00:08:00

[친절한 쿡기자 - 전정희의 시사소설 ‘조선500년 익스트림’]

“옥사를 다스리는 일은 분명하고 신중해야 한다. 그런데도 포도대장이란 자가 군졸을 풀어 정승 집을 에워싸고 살핀 것은 중죄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포도대장 구일을 파면하고 김해로 유배시켜라!”

숙종은 한가위를 앞둔 구월 열사흘날 포도대장(검찰총장 격) 구일을 파면했다.

하루아침에 죄인이 된 구일은 포승에 묶여 문경새재를 힘겹게 오르고 있었다. 앞으로도 나흘을 걸어야 유배지 김해에 닿을 수 있다. 구일의 손은 포승줄에 새카맣게 죽더니 짓무르기 시작했다.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됐을까? 숙종이 승정원 도승지(대통령 비서실장 격) 허적에 대한 신뢰를 들어내면서 자신을 내쳤다. 누구도 환관이 되어 가는 도승지를 제어하지 못했다. 집권당 남인 세력은 그가 조선을 살릴 구국의 영웅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반면 좌당 서인은 지리멸렬했다. 좌당은 연일 광화문 앞에서 대계(臺啓)로 도승지를 압박했으나 숙종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남인에게 서인은 이미 정적이 아니었다. 되레 집권당 내 도승지의 탁남과 도승지를 반대하는 청남 계보가 생겨나면서 계보 간 권력투쟁 양상을 띠고 있었다.

‘포도대장이 강간범조차 처벌할 수 없는 나라라면 남해안을 노략질 하는 왜구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백주 대낮에 유부녀가 납치되어 버려지는 나라가 어찌 천년을 간단 말인가. 뼈가 녹는 일이로다.’

구일은 숨을 가삐 몰아 걸으며 신세를 한탄했다. 불과 나흘 전만 하더라도 칠릭과 수혜자(무관의 옷과 신발)로 위엄을 드러내며 범죄자들을 벌벌 떨게 했던 조선의 포도대장이었으나 지금은 짚신에 무명 삼베, 그리고 포승에 묶여 경상도 오지 김해로 유배를 떠나는 신세가 됐다.

비서실장, “검찰총장은 변변치 못한 사람”

“포도대장 구일은 변변치 못한 자이옵니다. 사구(司寇·형벌을 맡은 벼슬)가 제 구실을 못해 국시를 지키는 이들을 형통케 못하게 하오니 마땅히 구일을 내쳐 대역으로 다스려야 하옵니다. 포도대장이란 자리는 백성의 치안을 위해서 있는 자리가 아니라 전하를 위한 치안의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앞뒤 안 가리고 백성 편에 서서 내란의 단초가 되었사옵니다.”

“민란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판에 도승지 사저를 에워싸고 몇날 며칠을 감시하는 포도대장은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인물이옵니다.”

“구일은 멀쩡한 사람 잡아다 고문을 가해 거짓 증언자를 만들어 도승지를 모함한 바, 이는 세리(勢利)를 딛고 내란을 획책하는 자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도승지를 보호하려는 비변사(국가정보원 격) 당상들은 일제히 구일을 비난했다.

이에 숙종은 사간원(언론사), 육조(각 부 장관) 대신에 이어 비변사 당상들까지 나서자 한성부좌윤(서울시장 격) 남구만의 상소로 시작된 ‘부녀자 강음 사건’에 거대한 흑막이 있는 것 아닌가 하고 흔들리기 시작했다.

‘남구만이 남치근의 후손인데 이 자가 그럴 리 없는데…더구나 그는 형조판서까지 거친 자 아닌가? 구일 또한 강직하여 종사관들이 충성하며 따르는 자 아니던가.’

숙종은 좌고우면했다.

남치근은 임꺽정을 체포한 포도대장이었다. 구일은 숙종이 직접 임명장을 수여했었다. 그러나 구일은 선왕 현종 승하 직전 임명됐고 숙종은 그에 대한 절차만 밟았을 뿐이다. 숙종은 입을 굳게 다물고 비변사 당상들의 진언을 들었다.

누구도 ‘유부녀 이차옥 강음 사건’이 사화로 까지 치닫게 될 줄 몰랐다.

권력형 비리 치려다 원조 권력에 막힌 검찰총장

이차옥은 절세미인이었다. 청 복색을 활용한 당코깃저고리를 하고 너울(쓰개)이라도 하면 장안 사내 중 눈이 안돌아 가는 자가 없었다. 궁중 화원들은 미인도를 그리기 위해 이차옥의 필동 집 앞에서 화구를 펼쳐 놓고 기다리기까지 했다. 태종 12년 법령으로 여인들에게 장옷을 입도록 한 후 양반가 규수의 얼굴은 장옷 때문에 볼 수가 없었으나 비단 여덟 폭으로 된 너울을 이차옥이 처음 쓰면서 반가 여인네 얼굴을 그나마 살필 수 있었다.

궁중 화원들이 찾는다는 이차옥에 대해 또 한 사람 귀가 번쩍 뜨이는 이가 있었다. 도승지 허적의 서자 허견이었다. 음직(특채)으로 교서관정자라는 낮은 벼슬을 하고 있던 그는 아버지를 믿고 천하의 한량 짓을 해댔다. 그러나 아무도 그의 음행에 대해 건드리는 자가 없었다. 허적은 적장자가 없었던지라 서자였던 허견을 애지중지했다.

허견은 이차옥이 한 달에 한 번 동대문 밖 관왕묘로 공을 들이러 간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차옥의 남편 서억만이 시름시름 앓던 터였다. 남산 밑 필동 집을 나온 차옥은 비녀를 앞세워 장충골을 지나 성 길을 따라 동대문 방향으로 부지런히 걷고 있었다. 너울 사이로 들어온 남산 소나무 바람이 시원했다. 어영청 분영인 남소영(南小營·지금의 장충단공원)을 돌아 남소문이 보이는 방목교에 다다랐을 때 말을 탄 사내가 말을 세우고 내렸다.

“자네가 서억만의 처인가?”

몸종이 이차옥을 대신에 말을 받았다.

“누구시온데?”

“자네 시어머니가 위급하네. 시아버지(서동지)께서 속히 모셔 오라 하여 이리 달려왔네.”

당황한 이차옥이 쩔쩔 매고 있는데 사내가 말에 올라타라며 다그쳤다. 상황이 급한지라 차옥이 그 말안장에 앉게 됐고, 사내는 몸종을 놔둔 채 산길로 말을 달렸다.“

사내가 여인의 엉덩이를 끌어안고 옷을 벗겼다

사내가 채찍질한 말은 필동을 휙 지나고 있었다. 차옥은 너울도 벗지 못한 상태에서 바람이 들이쳐 어디로 가느냐고 제대로 말할 수도 없었다.

“사직동에 들러 오라 하셨네. 무엇인지 모르겠으나 사직동에서 제향 기물을 가져오라 하셨네.”

사내는 혼자 말 하듯 그리 말했다.


말이 사직동 한 반가 솟을대문에 이르자 노복들이 대문을 활짝 열었다. 차옥은 내릴 틈도 없이 대문을 지나 사당 삼문 앞에 당도해서야 내릴 수 있었다.

“같이 들어가야 겠소.”

흑립과 감물 도포를 입은 사내는 갓끈을 바로 잡으며 삼문으로 차옥을 밀어 넣었다. 그리고 이내 문이 닫혔다. 차옥은 그때까지도 사당인지라 사내를 의심하지 않았다.

“내 자네를 연모해 왔네. 자네는 이미 이곳에 발을 들여 놓았으니 허씨 가문 아녀자일세. 이제 나갈 수 없네.”

차옥은 쿵 하고 가슴이 무너지는 소리를 느꼈다. 소리를 지르려 하자 사내의 널찍한 손이 너울 위를 덮으며 입을 막았다.

“반항해 봐야 소용없네.”

사내는 차옥의 입을 막으며 한 손으로 엉덩이를 안아 세 칸짜리 사당 민흘림기둥에 밀어붙였다.

차옥이 힘을 다해 사내의 손을 물었으나 그는 통증을 참으며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차옥은 그 싸늘한 미소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사내가 너울을 세차게 걷어내자 너울을 받쳤던 전립과 주홍 끈이 벗겨지며 너울 일체가 사당 댓돌로 굴러 떨어졌다.

‘관우님, 이년을 구해주소서.’

차옥은 관왕묘 신께 빌었으나 그곳은 도승지 허적 가문의 사당이었다. 사내는 그 서자 허견이었다.

유부녀 납치, 겁탈한 권력자의 아들

“야 이놈아 세상에 건드릴 년이 없어 관왕묘(關王廟)에 가는 양가집 규수를 범한단 말이냐? 장안 기생도 있고 문고리 제 껴 놓은 과부도 숱한데 남편 있는 여자를 보쌈한단 말이냐! 더구나 사당에서! 어허, 이런 미친놈을…”

허견은 허적의 호통에도 아랑곳 않고 입을 실룩거렸다. 저 또한 여염집 유부녀에게서 난 서자였다.

차옥이 사당에서 겁간을 당한 후 깨어보니 허견의 안방 보료 위에 속곳만 걸친 채였다. 만신창이가 된 몸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로부터 닷새 후 차옥은 필동 서억만의 집 앞에 버려졌다. 그러나 서동지와 서억만 부자는 훼절 당한 차옥에게 끝내 문을 열어 주지 않았다. 그 소식을 들은 차옥의 친정아버지 이동귀는 치욕과 분노를 안고 딸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 백방으로 뛰었다. 허견을 포도청에 고발했다.

그러나 허적의 세도가 무서웠던 양반들은 누구도 그를 돕지 않았다. 여인네가 남정네를, 아내가 남편을, 노비가 양반을, 낮은 벼슬이 높은 벼슬을 고변하는 것이 근본적으로 막힌 조선이었다.

서울시장, 권력자 아들 처벌해 달라 탄원

남구만은 의협심이 남달랐다. 이조정랑, 대사간, 대사성, 전라도 및 함경도 관찰사를 역임한 그는 형조판서를 거쳐 한성부좌윤이 됐다. 데리고 있던 형조 관원에게 이차옥 강음 사건을 접한 남구만은 숙종께 상소를 올렸다.

‘허견의 강음은 삼강오륜을 범한 중대 범죄이옵니다. 하온데 이 일이 포도청의 공소에도 불구하고 도승지 허적의 압력을 받아 실업이 되었으니 이는 권력이 범법자를 비호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오니까? 남의 부녀자를 강음한 자는 흉악한 도적보다 더하니 마땅히 처벌하게 하소서.’

때를 같이해 형조판서 김석주도 아뢨다.

“허견의 악행과 수사를 방해한 도승지 허적을 소환 조사하여 엄벌하지 않으면 백성이 들고 일어날 것이옵니다.”

하지만 김석주는 남구만과 달리 나름 계산을 하고 있었다. 대신 가운데 몇 안 되는 서인이었던 그는 이 기회를 활용해 남인 정권을 무너뜨릴 요량이었다.

이처럼 ‘부녀자 이차옥 강음 사건’은 집권당 남인의 탁남과 청남, 좌당 서인 등이 뒤엉켜 서로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정쟁으로 변질되고 있었다.


상소를 본 숙종이 말했다.

“인심과 세도가 날로 간악해지는구나. 포도청은 엄중 조사하라!”

명받은 구일은 낯빛이 어두웠다. 그는 강원도 횡성 현감을 지낼 때 묵은 땅을 개간해 송덕비를 받을 정도로 청렴한 인물이었다.

구일은 포도부장을 시켜 이차옥의 몸종 득민을 불러 진술을 받았다.

“아씨를 납치한 것은 사직동 허견이옵니다.”

구일은 몸종의 진술에도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자칫 권력자들에게 당쟁을 일삼는 포도대장으로 몰릴 우려가 있어서였다. 그는 남소영 일대를 탐문해 그날 납치 현장을 본 증인 순기라는 자를 찾았다. 순기는 허견을 뒤따라온 종이었다. 그는 사령들의 호통에 제 주인이 그랬음을 사실대로 불었다.


“허견을 잡아들일까요?”

이에 구일이 말했다.

“간단한 문제는 아니로구나. 워낙 거물이야. 내가 나서마.”

그는 잘못됐다간 부하들을 다치게 할 수도 있다싶어 직접 나섰다.

구일이 사직동 사저를 찾아 허견에 대한 영장을 들이밀자 허적의 노비들이 완강히 저항했다.

“포도대장이 제시한 순기라는 종은 여기 노비가 아니오. 따라서 허견 나리는 죄인이 아니오. 돌아가시오. 여기는 도승지 대감 댁이오. 포도대장이 종사를 이끄는 도승지를 능멸할 수 있소?”

“수색 영장을 가져왔다. 얼른 문을 열어라!”

그때 도승지 허적이 나섰다.

“웬 소란이냐? 포도대장은 도적이나 잡으면 되지 의금부나 형조가 할 일에 끼어들어 왜 업무침해를 하는가. 무엇보다 내 아들은 그런 악행을 범하지 않았네. 여기가 어느 안전인지 정확히 파악하고 영장을 제시하게.”

허적이 그리 말한 뒤 육중한 대문이 굳게 닫혔다.

포도부장이 구일에게 말했다.

“어찌할까요?”

“방법이 없구나. 일단 사저를 에워싸라. 몇날 며칠이고 기다려 허견이 나오거든 체포하자.”

권력자 사저 에워싸 압송에 나선 검찰

이 사건은 형조에도 접보되어 별도의 수사가 진행됐다. 형조판서 김석주는 포도청은 도적 잡는 곳이라며 고발 사건인 만큼 형조에 치리 권한이 있다며 사건을 확대시켰다. 또 왕명이 있었던 터라 의금부도 나서 상황이 더욱 복잡하게 돌아갔다. 형조와 의금부에서 이차옥의 아버지 이동귀, 차옥의 몸종 등을 불러 호된 조사를 벌였다.

게다가 좌의정 권대운, 우의정 민희 등까지 나서 전말을 당파 이익에 따라 간언하니 본질은 간데
없고 정치 투쟁만 남게 됐다.

어느 날 숙종이 도승지 허적에게 강간 사건에 대해 물었다.

“전하, 제가 적장자가 없어 아들 견을 그 어느 아비보다 정성을 다해 키웠습니다. 제 집 사당에서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도 믿을 수 없거니와 제가 집에 있는데 어찌 닷새간이나 남의 아내를 묶어 두었던 말입니까? 이는 성상과 저를 음해하기 위한 청남과 서인들의 무고이옵니다. 포도대장 구일은 이러한 정세 판단도 못하는 미욱한 자로 조자룡 헌 칼 쓰듯 하고 있습니다. 또 고변자인 한성부좌윤 남구만을 파직하옵소서.”

그러자 숙종이 말했다.

“남구만이란 자는 내 그럴 줄 알았다. 이런 소를 올렸다는 것 자체가 마음이 삐뚤어진 자로다. 그를 유배시켜라.”

허적은 이 한마디에 승기를 잡았다고 느꼈다. 임금의 복심을 읽어냈기 때문이다.

대통령 복심 읽어낸 비서실장

숙종은 이때 남인 혁신세력 청남파를 견제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러자면 탁남에 의지할 필요가 있었다. 탁남은 예송논쟁을 통해 숭명사상을 더욱 강화한 이들로 조선의 뿌리 성리학을 지키는 기호 및 경화사족이었다. 그러나 청남은 영남학파들로 그 뿌리가 천하다고 보았다.

그때 의금부로 불려간 이동귀가 가혹한 조사에 손을 들고 말았다.

“허견이 내 딸을 강음했다고 했으나 포도청 강압 수사에 따른 거짓 자백이었습니다. 몸종 또한 강압 수사에 따른 것이옵니다. 허견의 종 순기란 인물도 가공인물이옵니다.”

이를 접한 숙종은 판부(판결문)했다.

‘이 사건은 포도대장 구일이 지어낸 거짓 자백에 따른 무고이다. 구일은 포도대장으로서 옥사를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허견의 죄를 조작하여 영의정의 사저를 염탐 하는 등 그 죄가 가볍다 아니할 수 없다. 구일을 경상도 김해로 유배하고 포도청 부장과 종사관도 처벌하라.’

검찰총장, 색깔정치에 무너지다

나룻배가 왜관 나루터를 떠나 낙동강 한 가운데를 헤쳐 나갔다. 구일은 목이 말랐으나 애써 거부했다. 부하들을 지키지 못한 죄책감에서 물 한 모금 넘기기 어려웠다.


허적은 권력으로 자리를 지켰다. 백성들은 ‘권력무죄’라며 통탄했으나 달리 방도가 없었다. 숙종은 구일의 후임으로 형조판서 김석주를 임명했다. 서인이었던 김석주는 남인 허적을 겨냥해 칼을 뽑을 기회가 왔다며 별렀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전정희 기자·시사소설 작가 jhjeon@kmib.co.kr
전정희 기자
jhjeon@kmib.co.kr
전정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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