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정희의 시사소설] 원조 친박 화성甲 진출, 대통령의 비서실장 견제용

[전정희의 시사소설] 원조 친박 화성甲 진출, 대통령의 비서실장 견제용

기사승인 2013-10-01 16:56:01

[친절한 쿡기자 - 전정희의 ‘조선500년 익스트림’]

비서실장 첩, 경찰에 놀라 병풍 뒤로 숨다

“대감, 이를 어찌합니까? 금부도사가 우리를 잡으러 왔습니다.”

정난정이 절규하듯 남편 윤원형에게 말했다. 갓끈인 목영을 꿰고 있던 윤원형은 그 소리에 놀라 실을 놓치고 말았다. 목영 알이 쏟아지면서 방바닥으로 굴렀다.

하얗게 질린 난정은 남색 갑사치마 끈이 풀린 것도 모른 채 바들바들 떨며 낡은 병풍 뒤로 숨으려 했다. 급히 서두르다 보니 갑사치마가 흘러내리면서 흩어진 목영 알을 덮었다. 때에 찌든 고쟁이만 걸친 난정은 정작 병풍 뒤로 목만 숨었을 뿐이었다.

윤원형도 목침을 딛고 일어서려고 발버둥 쳤다. 그러나 오른손에 풍이 와 힘을 줄 수 없다 보니 일어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도 발심을 다했다. 간신히 일어났다 싶었는데 갑사치마 밑 목영 알 무더기를 밟아 어, 어, 어 하며 넘어졌다. 엉치뼈가 그대로 목영에 닿아 숨쉬기조차 힘들었다.

내외가 방안에서 그 소동을 벌이고 있을 때 정작 밖은 너무나 조용했다. 사립문 밖 오동나무 잎이 색을 바래기 시작하는 10월 초였다.

전 승정원 도승지(청와대 비서실장 격) 윤원형과 그의 기생 출신 첩 정난정이 시신으로 발견된 것으로 그로부터 이틀 후였다. 두 사람은 비상을 먹고 숨져 있었다. 약이 워낙 독했던지 피와 거품을 뿜고 죽었다. 그들이 황해도 강음 땅에 유배를 온 것은 중종의 계비 문정왕후가 죽은 해(1565년)였다.

“여자인 내가 대통령해도 너보다 잘하겠다”

중종의 정비 장경왕후에게서 난 인종이 재위 8개월 만에 죽었다. 그러자 문정황후의 아들 경원대군(명종)이 열두 살로 왕위를 물려받았다. 문정이 곧바로 수렴청정을 했다. 사실상의 여왕이었다.

문정은 독한 여인이었다. 명종실록은 ‘암탉이 새벽에 우는 것은 집안이 다함이다’라고 적었는데 이는 문정을 두고 한 말이었다.

인종은 어머니 장경왕후가 자신을 낳자마자 죽고 문정왕후 손에 의해 길러졌다. 그런데도 인종은 계모 문정에 대한 효심이 남달랐다. 문정이 효도하도록 길들였다고들 했다.

문정의 차고, 매서운 성격은 인종이 왕이 됐다고 해서 달라지지 않았다.

“상감, 우리 모자를 언제 죽일 생각입니까? 늘 우리 모자를 죽이려고 획책하지 않습니까? 죽이려면 빨리 죽이십시오!”

“어머니, 왜 이러십니까? 어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십니까. 제 어머니이십니다.”

인종은 이처럼 지극했으나 어느 날 장경왕후가 준 떡을 먹고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고 야사는 전하고 있다.

당연히 경원대군이 왕이 됐다. 문정은 명종이 친아들이라고 해서 그 드센 성격이 달라지지 않았다. 아들이 왕인데도 쌍욕을 할 정도로 매몰찼다.

“네가 누구 덕분에 왕이 됐는데 이 어미를 무시하느냐? 네 외삼촌들에게 그깟 한직이나 주려거든 차라리 동네 개에게나 주어라. 대윤(大尹·요즘 ·반박 격)이 큰 소리 친다고 네 큰 외삼촌을 내몰아? 네가 정녕 임금이더냐? 차라리 아녀자인 내가 해도 너 보다 잘하겠다. 그렇게 흐리멍덩해서 사림(야당 격)에게 정권 고스란히 바치지 않으면 다행이다. 정신 좀 똑바로 차리거라!”

야사는 임금의 뺨을 올려붙이고 종아리를 걷어 올리게 했다고 한다.

어머니의 그런 포악이 항상 두려웠던 명종은 열다섯 살 때까지 오줌을 질질 쌀 정도였다. 문정은 아들 명종이 완전히 손아귀에 들어오자 발 뒤에서 늘 종이에 적어 하교했다. 종이와 붓을 든 궁녀가 상시 대기했다.


‘반박’ 검찰총장을 제거하라

인종 1년. 명나라 사은사로 북경에 갔던 승정원 제조 윤문화가 이화원 정자에서 역관 메이라이를 겁간 하려다 톡톡히 망신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메이라이는 조선이 공녀로 바친 여인으로 언어감각이 남달랐다.

메이라이는 조선에 가뭄이 들어 아사자가 속출할 때 부모 공양을 위해 공녀를 자청했다. 그리고 산둥성 지난(濟南) 도호부사 첩실이 되었다. 하지만 한어(漢語)에 탁월한 능력을 보여 역관이 되었던 것이다.

윤문화는 백주를 마시고 인사불성이 되어 실수를 했다고 했으나 축하연이 벌어지고 있는 정자 아래서 그랬던지라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훼절 당한 메이라이는 수치심과 두 번씩이나 백성을 지켜주지 못하는 조선에 대한 분노를 안고 이화원 연못에 몸을 던져 죽었다.

대명 조공 사신의 난행에 사림은 문정의 수렴청정에 따른 인재라고 몰아붙였다. 윤문화는 왕후의 큰 오라버니 윤원로의 큰 아들이었다.

“어머니, 문화 형을 파직해야 하옵니다. 민심이 들끓습니다.”

인종이 그렇게 말했다.

“그렇게 강단이 없단 말이냐? 사림이 너를 간교하게 공격할 때 이를 뛰어난 문장으로 막아낸 사람이 윤문화이느니라.”

그 무렵 집권당은 대윤(반박 격)과 소윤(친박 격)으로 갈려 암투를 벌였다.

장경왕후의 파평윤씨 권력은 대윤, 문정왕후 쪽 파평윤씨 권력은 소윤으로 불릴 때였다. 각기 좌장은 윤임과 윤원로였다. 그러나 문정이 인종을 사실상 수렴청정 하면서 곧바로 형조판서 윤임(검찰총장 격) 제거에 들어갔다. 윤임은 장경왕후의 오빠였다. 윤임의 죄목은 축첩이었다.

그러나 윤임은 윤원로가 경원대군(명종)이 왕이 된다는 헛소문을 퍼뜨리고 다녀 국정을 문란케 한다며 탄핵으로 역공을 취했다. 인종의 세를 업은 저항이었다. 여기에 사림까지 가세해 윤원로와 문정을 압박했다.

문정왕후는 난감했다.

“오라버니, 대윤의 공세가 드셉니다. 일단 소나기 피하셔야 합니다. 제가 누구입니까? 저를 믿으시고 정계 은퇴를 선언하십시오. 제가 다잡은 일은 꼭 이룬다는 거 아시잖습니까.”

문정은 손을 쥔 채 부르르 떨며 어금니를 깨물었다.

“국모를 국모로 보지 않는 네 놈들을 찍어 내리라!”

그 뒤로 인종이 승하했다. 불과 8개월 재위였다.


“어찌 강건하시던 인종께서 갑작스레 승하한단 말입니까? 이는 필시 계모 문정왕후의 계략이옵니다.”

대윤과 사림의 대신들이 일제히 문정의 음모를 탄핵했으나, 문정은 즉위한 명종의 뺨을 때려가며 나약한 대처를 나무랐다.


“이놈들이 아녀자가 국정을 잡았다고 우습게 보는구나. 국모를 국모로 보지 않는 네 놈들을 내 반드시 찍어 내리라!”

문정은 사헌부(국가정보원 격)를 동원해 윤임부터 찍어내기로 마음먹었다. 그를 위해선 자신의 뜻을 과단성 있게 실천해 줄 수 있는 인물이 필요했다. 이를 위해 둘째 오빠 윤원형을 승정원 도승지로 임명했다.

권력, 비서실장에게 집중되다

윤원형은 형 원로와 달리 모사에 뛰어났다. 그는 곧바로 문정의 밀지를 받아 윤임을 비롯한 대윤 대신들을 모조리 유배시켰다. 사헌부가 윤임의 뒷조사를 했던 것이다.

그 가운데 윤임 유관 유인숙 등은 유배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사사하라는 명령이 떨어져 길에서 죽었다. 윤임의 경우는 아들 3형제와 함께 같은 날 죽었다.

뒤이어 윤임의 일파가 계림군을 왕위 옹립을 모의했다 해서 또 한 번의 피의 숙청이 이어졌다. 계림군은 서자였으므로 세자 축에도 못 끼는 존재였다. 그런데도 소윤은 대윤의 싹을 말리기 위해 계림군을 사지에 넣어 역모를 조작했다. 을사사화에 이은 대숙청이었다.


반면 윤원형 정순붕 이기 임백령 허자 등은 이러한 공로로 위사공신으로 책봉되어 삼사와 육조의 대신을 나누어 차지하며 신권력으로 떠올랐다. 정국은 이제 완벽하게 문정의 손에 들어왔다. 문정이 그제야 숨을 돌리며 말했다.

“큰 오빠를 불러 올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문정이 원형에게 얘기하자 원형이 떨떠름해 했다. 비록 친형이긴 하나 그 형이 위사공신에 상정되지 못하자 대놓고 원형에게 욕을 해댔다.

“네가 도승지가 된 것은 순전히 내 공로에 의한 것이 아니냐? 내가 비록 자원부처해 전라도 해남으로 유배를 갔다만 그것이 진정한 자원부처더냐? 니 놈이 왕후께 대윤을 피하려면 그리할 수밖에 없다고 낸 묘책 아니더냐. 그런데도 네가 도승지가 되서도 나를 발탁치 아니한단 말이냐? 그것도 모자라 왕후께 내가 무능하다고 힐난을 해?”

원로는 그렇게 동생을 원망했다.

형제간 권력 싸움은 문정이 개입해서야 정리할 수 있었다.

“큰 오라버니, 그간 고생하셨습니다. 이제 정계 복귀를 선언하시고 수원유수부(경기도 화성 甲 선거구 격) 유수로 가주세요.”

이를 두고 세간에서는 원조 문정파가 등장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원로가 화성 장악에 나섬으로써 4대 유수(남한산성·강화·개성)는 소위 ‘원문파’로 채워졌다. 승정원 도승지를 중심으로 한 도성 안 ‘친문파’와 세력 다툼을 벌이게 된 것이다.

이는 오빠 둘을 권력의 축으로 두고 경쟁하게 함으로써 충성도를 높이고 권력 분점을 통한 자신의 입지를 공고히 하려는 문정의 고단수 정치 감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복지부장관, “강남 사는 고위 관리는 금대접으로 밥을 먹더라”

그러나 1559년을 전후로 왜구가 들끓고 민란이 잦아졌다. 흉년까지 들어 백성은 못살겠다고 아우성이었다. 수많은 노인들이 굶어죽거나 버려졌다. 고려장이 불가피하게 되살아났다.

그럼에도 윤원형은 받은 뇌물로 집 앞에 시전을 열 정도로 재물을 주체할 줄 몰랐다. 그 시전 상권은 적처까지 몰아낸 기생 출신 정난정이 장악했다.

머리 좋은 난정은 문정에게 승려 보우를 소개해 각종 불사가 이뤄졌는데 이를 두고 백성들은 “먹을 것이 없어 부모를 산에 버리는 판에 부패한 암탉이 요승에 놀아나고 있다”고 분노했다.

이때 진휼청(보건복지부 격) 승지 진용산이 노인들이 굶어죽는 것을 막고자 진휼계(기초연금 격)를 추진했으나 승정원 도승지 윤형원이 “산에 내다 버리는 것만 법으로 막으면 되지 웬 구휼미를 죽을 때까지 주느냐”며 면박을 주었다. 진휼청은 성밖 서부 용산(지금의 용산구 신창동)에 있었다.


진용산이 윤형원의 얘기에 부아를 참지 못하고 한 마디 했다.

“북촌(지금의 강남 격) 어느 댁에서는 금대접으로 밥을 먹는다 하옵니다. 수라간 제조 상궁이 그 집에 파견되어 간을 본다 하옵니다. 굶어죽는 백성 구황이 이뤄지지 않으면 저는 승지직을 더는 수행할 수 없습니다.”

“진 승지. 지금 나를 빗대 하는 얘기요? 당신 가문이 아무리 한강 나루 상권을 잡고 있다고 하더라도 왕후의 은덕이 아니면 그 상권 지킬 줄이나 아시오? 당신은 ‘원문’ '친문' ‘반문’을 오락가락하며 잇속이나 챙기려 하는데, 그런 행위가 왕후의 심기를 얼마나 건드리는 줄 진정 모르오? 형조판서 날아갔던 것 보고도 그러오? 먼지 털어도 진짜 깨끗하오? 왕후 심기 건드리지 말고 모양 좋게 끝내십시다. 왕후께서 별도의 말씀이 있을 때까지 하던 일 계속 하시오.”

그럼에도 진용산은 구휼 없는 진휼청이나 구황청은 결국 백성을 위한 나라가 아니라며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 정국은 진용산 항명이 덮치면서 친문, 원문, 반문 등이 뒤엉켜 수습 불가능한 혼돈에 빠졌다.

문정왕후는 그럴수록 강경 자세를 고수했다.

“가난은 나라도 구제 못한다고 했는데 진휼청이 나선다고 해결되겠는가. 소격서에서 노인들에 대한 예의만 갖춰 제사나 잘 지내면 그거로써 된 것 아닌가. 진휼청 승지는 자신에게 가해진 비판을 겸허히 받아 들여야지 그 비판을 피한다고 문제가 해결될 것 같은가?”

문정은 발 뒤에서 이 같이 적어 명종에게 읽도록 했다. 부드러운 어조였으나 행간에 칼날이 숨겨 있었다. 그날로 진 승지는 파직됐다. 그리고 그의 거취를 아는 이가 없었다. 흑산도 유배 중 사사됐다는 소문만 돌았다.

기초연금?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와중에 임꺽정 무리가 황해도, 경기도, 평안도, 강원도 등에 신출귀몰하며 공납을 털고 토호 집을 약탈하는 행위가 계속됐다. 조정은 포도대장 남치근 등을 시켜 임꺽정의 본거지 구월산 등을 포위하고 체포에 나섰으나 백성들이 토벌에 협조하지 않아 매번 놓치고 말았다.

문정왕후의 악정에 반발한 백성은 되레 엉뚱한 고변으로 토벌군을 혼란에 빠뜨렸다.

부역과 군역에 시달린 백성은 먹물 장삼을 입고 절에 들어가 몸을 의탁했다. 우역과 역질도 퍼져 수천마리의 소가 죽어 농업생산 기반이 크게 위축됐다.

그럼에도 윤형원의 권력 독점은 계속됐다. 그는 형 윤원로까지 죽이는 패륜을 벌이면서까지 권력을 지켰다.

명종 즉위 20년. 문정왕후가 회암사 큰 재를 앞두고 목욕재계한 뒤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사림은 즉각 윤형원을 사사하라고 연일 계를 올렸다. 명종도 비로소 어머니 그늘에 벗어나 “당장 저 발부터 치워라”하며 첫 어명을 내렸다.

“도승지 윤형원을 황해도 강음으로 유배시켜라!”

그렇게 강음으로 유배 떠난 윤형원과 정난정은 늘 사사의 공포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음독한 그날. 실은 강음현감이 나졸들을 데리고 임꺽정 잔당을 잡으러 그 마을에 들이닥친 것인데 이를 금부도사로 알고 지레 겁을 먹은 윤형원 정난정이 자살로 비굴한 인생을 마감한 것이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전정희 기자·시사소설 작가 jhjeon@kmib.co.kr
전정희 기자
jhjeon@kmib.co.kr
전정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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