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정희의 시사소설] 신임 검찰총장 부인, "국민 상대로 싸우는 권력기관 한심스럽다""

"[전정희의 시사소설] 신임 검찰총장 부인, "국민 상대로 싸우는 권력기관 한심스럽다""

기사승인 2013-10-28 16:58:00

[전정희의 시사소설 - 조선500년 익스트림]

갑오년(1894) 팔월 말이었다. 김지리 처 조이(趙二)는 남편의 시신 수습을 위해 전라도 나주로 향했다. 어린 아들과 함께였다. 몸종과 구종, 이렇게 넷이었다.

조이는 남편 몰래 야소교를 믿고 있었다. 이것이 알려지기라도 하면 시댁과 친정 모두가 몰살당할지도 모르기 때문에 입도 뻥긋 하지 않고 살았다. 철종 임금 이후 조선은 부패가 극에 달해 정도령사상과 천주학쟁이들에 의한 메시아사상이 넓게 퍼졌다. 조이 가문은 정약용 가문과 함께 서학을 믿다 몰락했다.

조이는 남산 딸깍발이인 아버지 영향으로 일찍이 사서삼경을 공부했다. 공부할수록 조선에서 아녀자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조선은 사대부의 나라였고, 그 사대부 가운데서도 입신양명한 이와 혼인을 하지 않는 한 사람 구실이 어려운 나라였다.

다행이 조이의 빼어난 미모와 현명함으로 지아비를 고르는데 신중했다. 가난한 선비의 딸에게 무인 김지리는 분에 넘쳤다. 조이는 남편을 통해 뒤틀어진 세상을 바로 잡을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을 했다.

《신임 검찰총장 부인, 비보 듣고 나주로 향하다》

조이 일행이 양재역말을 지나자 비렁뱅이들이 바가지를 들이밀며 달려들었다. 아이가 무서웠던지 울음을 터뜨렸다.

“울지말거라. 저들은 배가 고파서 그러는 것이다.”

“어머니, 저…저기 보세요.”

조이는 아이의 눈을 감쌌다. 굶어 죽은 시신이 길 한쪽 수채에 처박혀 썩어가고 있었다. 차마 볼 수 없을 만큼 참혹했다. 과천을 넘어 수원부로 향하는 길에도 산발한 비렁뱅이들이 불쑥불쑥 나타나 그들을 당혹케 했다. 구종 한길이가 칠척장신이 아니라면 봉변당하기 십상일 듯싶었다. 계집애답지 않게 목소리가 큰 산월이도 그들을 물리치는데 한몫했다.

조이는 몇날 며칠을 걸어 천안삼거리를 지나 공주로 향하는 길을 걷고 있었다. 지난 5월 동학교도들이 반란을 일으킨 후 그들이 휩쓸고 간 공주목의 참상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벼들이 태풍 맞은 듯 죄다 쓰러져 있었다. 반란군과 관군이 논에서 치열하게 전투를 벌였기 때문이다.

논 군데군데 흰 바가지처럼 생긴 것들이 눈에 뜨였다. 전투 중 사망한 병사의 해골이었다. 시신은 독수리에게 파 먹힌 후 구더기가 끓었다. 누구도 수습하려 하지 않았다. 공주목 인근 청산현과 진잠현에선 반란군에 포위된 관군이 몰살당했다고 한다.

조이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남편 시신도 수습되지 않은 채 어느 논 가운데서 썩어 가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조이는 조랑말에서 내려 장옷을 머리에 걸치고 걸었다.

“마님, 그리 걸으시면 오래 못가십니다. 오르십시오.”

“내 어찌 지아비가 죽었다는데 편하게 말을 타고 갈 수 있겠느냐.”

조이는 조랑말 위 아이의 손을 쥐고서 그렇게 공주를 지나 부여로 향했다. 백마강은 모래가 명경처럼 맑았으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친일파 내각의 탄생》

김지리는 포도부장(검사 격)을 지낸 인물이었다. 그러나 김지리는 반외세 기치를 내건 흥선대원군이 집정하면서 친일적 인물이다 하여 삭탈관직 당했다. 그는 이후 삼천포로 낙향해 경상우도 출신인 승정원 도승지(대통령 비서실장 격) 김거침의 문하가 되어 재기를 다지고 있었다. 김거침은 우도서원 좌장이었으나 대원군의 서원철폐로 서원전마저 뺏기고 붕당만 유지한 채 이를 갈고 있었다.

그런데 이 해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친일파 내각이 수립됐다. 김거침은 곧바로 고종의 도승지가 되었다.

김거침이 도승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1882년 6월 일본 하나부사가 요시모토가 군함 4척을 이끌고 인천항에 도착했을 때 그를 맞아 제물포조약을 성사시킨 인연이 있었다. 앞서 김거침은 1877년 동래(부산) 수령을 하면서 하나부사의 편의를 봐주었다. 그의 친일 성향은 이때부터 생겼다.

그 해 조선 정부가 동래 두모진에 세관을 설치하자 하나부사가 군함을 타고 두모진에 정박 시위하며 세관 철폐를 요구했는데 이때 김거침이 하나부사를 맞았다.

“이것은 화란 술입니다. 양주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니뽄도인데 절삭력이 매우 뛰어납니다. 임진년에 조선에서 건너온 김씨라는 장인이 만들었스무니다. 선물이니무니다.”

그러면서 하나부사는 김거침에게 슬쩍 금 궤짝을 내밀었다. 금궤와 양주, 니뽄도를 받은 김거침은 이후 하나부사가 번사(市長)로 있는 오카야마번과의 교역 물품에 대해 일체 세금을 매기지 않았다. 그는 두모포와 오카야마번과의 교역을 통해 떼돈을 모아 민씨 척족에게 내놓았다.


한편 김지리는 낙향 후 이런 김거침과 사제를 맺고 우도서원을 이끌었다. 김지리는 화려한 대명률 해석가(변호사 격)로 양민으로 하여금 서원 투탁(投託)을 유도하는데 탁월한 솜씨를 보였다. 양민은 김지리의 권유에 원노(院奴)가 되어 군역을 기피했다. 당연히 재물이 쌓였다. 경상우도 붕당은 조선말 그렇게 강화됐다.

《교수들, 영혼 없는 권력 해바리기》

갑오년 정월. 도성은 전라도 고부현에서 터진 동학교도의 난으로 하루하루가 살얼음 판국이었다. 민비에 놀아나는 고종, 오로지 척족만 요직에 앉히는 민비에 대한 백성의 원성이 하늘을 찔렀다. 그러거나 말거나 민비는 상의원에 시켜 화려한 옷을 만들어 입었고 날마다 무당을 궐로 불러 굿을 했다.

‘궁 버들 푸르고 꽃은 한창 나부끼는데

온 성의 벼슬아치 봄빛에 아첨하네

조정에서 바야흐러 태평세월 축하한다는데

누가 곧은 말이 선비에게서 나오게 하는가’

이런 풍자시가 양민 사이에 회자되어도 정작 선비란 자들은 못들은 척했다. 권력이라도 잡으려는 먹물들은 그저 여흥민씨라면 머리 수그리기 바빴다. 서당, 향교, 서원 훈장(교수 격)이란 자들이 더했다.


그 바람에 민씨 서얼들이 적자 행세 하고 다니며 ‘베이징조선’ 사건과 같은 사기 행각을 벌였다. 베이징조선은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에 끌려간 백성 후손을 돕는다는 계(契)였다. 그 우두머리가 민비와 친하다고 사칭하고 다녔으나 정작 누구도 그 실체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달라는 대로 돈꾸러미를 내밀었다. 사역원(문화체육관광부 격), 종부시, 내자시, 내섬시 대신들이 거짓으로 작성된 ‘민비의 밀지’에 속아 수천 냥씩 털렸다.

《여주지청장, 도승지 인사에 제거되다》

여주목사(여주지청장 격) 여흥렬은 근 몇 년 뇌물을 들고 오는 지방 수령과 아전들 때문에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여주의 옛 이름이 여흥이었고, 여흥민씨 세상이다 보니 여주에 사는 자신의 이름을 보고 여흥민씨로 착각한 벼슬아치들이 여주목 관아를 찾아와 엽전꾸러미와 금, 비단, 인삼 등을 바쳤다. 민비가 여주 태생인데 그 고을 목사가 당연히 민비의 심복일 것이라는 지레짐작에서 그러는 듯 했다.

심지어 어떤 자는 여흥렬을 임오군란 때 반란군에 쫓긴 민비를 여주 장호원으로 피신시킨 민응식으로 알고 있기도 했다. 민응식은 그 때 일로 발탁되어 수구파 척신이 되었다.

여흥렬은 어쨌거나 뇌물 들고 찾아온 이들에게 얼굴 붉히지 않고 돌려보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 도가 넘어서고 있었다.


그들은 뇌물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매관매직을 위해 헛소문을 퍼뜨려 나라를 혼란에 빠뜨렸다. 참다못한 여흥렬이 사헌부(법무무)에 직접 조사에 나서 엄벌하겠다고 밝혔다. 사헌부 대사헌도 처음엔 격려를 마다하지 않았다.

여흥렬이 군사를 풀어 탐문해 보니 그 소문의 양산지가 장호원읍 민응식 사저였다.

“대감, 도총제사(국가정보원장 격) 민응식은 좀 더 많은 벼슬자리를 팔기 위해 왈패들을 시켜 헛소문(댓글 달기)을 유포하고 있습니다. 그 헛소문에 시달린 수령들이 자리에서 물러나면 그 자리를 얼른 주어 되팔고 있습니다. 이 자를 구속하지 않으면 팔도 벼슬자리는 죄다 매관매직되어 나라의 근간이 흔들리고 말 것입니다. 이미 전라도 고부에선 삼정문란으로 난이 발생하였사옵니다.”

여흥렬이 대사헌에게 이같이 고했다. 대사헌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재빨리 계산하더니 “좀 더 두고 봄세”만 연발했다.

여흥렬은 민응식 서자들을 검거하기 위해 장호원 사저를 압수수색했다. 수색 전 경기관찰사에게 보고하려 했으나 그는 수원부 교방에서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만취상태였다.

‘각생 기생 들어 온다/ 늙은 기생 젊은 기생/명기동기 들어온다’

노랫가락 소리에 여흥렬은 발길을 돌리면서 전결권으로 우선 처리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것이 갑오년 9월 초였다.

김지리는 이 무렵 포도대장에 임명됐다. 그와 동시에 여흥렬은 관직 박탈됐다. 둘은 과거에 급제한 후 성균관(서울대 법대 격)에서 동문수학한 바 있다.

무관들은 김지리의 임명을 두고 어부지리 했다고 수군댔다. 민비에 기댄 도승지의 인사라고도 했다. 당연히 매관매직 일삼는 민응식에 대한 검거는 무산됐다. 수사권이 포도청으로 이관 됐기 때문이다.

《검찰총장 부인, “군자 아닌 사람 거울삼으면 안돼”》

동학난이 확산되자 고종은 김지리를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로 임명하고 장위영 군사 800명을 주어 진압에 나서도록 했다. 그러나 겁이 났던 김지리는 김거침에게 부탁해 일본군이 개입해 줄 것을 요청했다. 김지리가 아내 조이에게 말했다.

“김거침 어른이 사해(四海) 감각을 갖춘 인물이 아니고 무엇이오. 개화한 일본 사람과 어찌 그리 친분이 두텁단 말이오. 특히 조선공사 하나부사와 막역하니 이런 분이 영의정이 돼야 하는 것 아니오. 도승지 어른에게 부탁해 동학당 토벌에 일본군이 출병할 수 있도록 부탁할 참이오.”

“저는 당신을 믿고 한 평생을 살자 혼인하였사옵니다. 아녀자의 생각이지만 절대 그리하면 아니 된다고 봅니다. 정묘, 병자 호란 때에 군사력 없이 명나라만 의지하였다가 임금이 삼도전의 수모를 당하지 아니하였습니까. 무과 벼슬로 한 평생을 살아온 당신께서 어찌 그리 협심이십니까. 사람에게 충성을 하다보면 실수가 나옵니다. 하늘에 충성하십시오. 군자가 아닌 사람을 거울로 삼아서는 아니 됩니다. 도승지가 그렇습니다.”

“이 사람이! 이래서 여인네를 가르치면 안 된다는 것이야! 노자께서 물을 거울삼지 말고 사람을 거울삼으라 했네. 도승지 대감은 거울과 같이 훌륭한 분이네.”

그렇게 말다툼 하던 것이 마지막이 되고 말았다.

그날 조이는 철릭을 챙겨 주며 남편에게 말했다.

“무구인지(無求人知)라 했습니다.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지 마십시오. 당신은 조선의 무장이십니다. 백성을 상대로 싸우고자 떠나는 무장이 내 낭군인 것이 참으로 한탄스러울 따름입니다. 이것이 오늘 조선의 현실입니다.”



《검찰총장, 갑옷 속 전대 푸니 숨긴 패물 쏟아져》

조이가 나주 관아에 도착했을 때 전봉준군과 김개남군에 포위당해 죽은 장위영 군사와 별기군 시신이 동헌 앞마당에 즐비하게 놓여져 있었다.

조이는 헌 누덕 동달이를 입은 초포수의 향도를 받아 김지리의 시신 있는 동헌 책실로 갔다. 시신은 광목이 가리고 있었다. 그 광목을 벗겨내니 철릭을 입은 채였다. 조이는 애써 울음을 참으며 남편의 볼을 비벼 댔다. 무장의 아내가 된 것을 처음으로 후회했다.

조이는 반장(返葬·객지에서 죽은 사람을 거두어 고향으로 옮겨 장사 지내는 일)을 위해 철릭을 벗겼다. 철릭 안 중치막엔 전장으로 떠나기 전 자신이 해줬던 자수 무늬가 그대로 있었다. 무장의 부부가 이별할 적에 꼭 해 넣는 정표였다.

조이는 비통하여 동헌이 떠나가도록 울었다. 그러다 기절했고, 자식 때문에 또 살아나곤 했다.

얼마 후 정신을 차린 조이는 염습을 위해 남편 중치막을 벗기는데 묵직한 전대 하나가 눈에 띄였다. 전대를 푸니 금가락지, 옥비녀, 패옥, 금향갑노리개, 백옥잠 등이 쏟아졌다. 대개 양반집 여인네 것이었다. 돌반지가 가득 든 궁낭(주머니의 하나)도 바지저고리에서 나왔다.

조이는 얼굴이 하얘지고 말았다.

‘지금껏 무장의 아내라는 자부심 하나로 살았는데 이 무슨 횡액이 계속된단 말인가. 적의 창칼에 허물없이 죽어야 사내라 하겠거늘 백성의 재물을 감추고 이리 죽을 수 있단 말인가. 이는 필시 부정한 방법으로 취한 것 아니고 무에란 말인가.’

조이는 낯부끄러워 얼굴을 들지 못했다.

‘무슨 면목으로 삼천포 선영에 들어간단 말인가. 반장을 해선 안되겠구나.’

조이는 가져온 옷가지로 대충 염습을 했다. 그리고 초포수 두엇을 사 영산강 가로 시신을 옮겼다.

시신은 초지에 쌓은 장작 위에서 태워졌다. 짚단을 얹을 때마다 불길이 오르고 잦아들기를 수십 번이었다.

‘적의 창칼에 허물없이 죽는 것, 그것이 무장의 길입니다. 부디 하늘에선 참 군인으로 사소서.’

국민일보 쿠키뉴스 전정희 기자·시사소설가 jhjeon@kmib.co.kr
전정희 기자
jhjeon@kmib.co.kr
전정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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