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 연예] 영화 ‘변호인’의 돌풍은 이미 하나의 사회 현상이 됐다.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삶에서 모티브를 얻어 만들어졌지만 대중은 이 작품에서 자신의 정치 성향과는 무관하게 큰 감동과 위로를 받는 분위기다. 지난달 18일 개봉한 ‘변호인’은 벌써 800만명 넘는 관객을 동원하며 순항 중이다.
9일 서울 종로구 북촌로 한 카페에서 ‘변호인’을 연출한 양우석(45) 감독을 만났다. 웹툰 스토리 작가 출신인 그는 ‘변호인’을 통해 감독 데뷔전을 치른 ‘초보’ 감독이다. 만약 ‘변호인’이 1000만 관객을 돌파한다면 그는 데뷔작으로 1000만명을 동원한 최초의 감독이 된다. 그는 “지금의 상황이 얼떨떨하다”면서도 담담하고 진지한 어조로 ‘변호인’ 열풍에 대한 소감을 밝혔다.
-영화를 둘러싼 반응이 열광적이다.
“많은 우려와 편견이 기다리고 있었던 게 사실이다. 어느 정도의 논란은 있을 거라 예상했다. 그런 영화를 이렇게 많이 봐주시고 호응해주셔서 감사드리고 있다.”
-‘변호인’을 구상하게 된 계기가 궁금한데.
“우리나라 전통적 이야기의 ‘원형’ 중 하나는 춘향전이다. 평범한 사람이 시험을 통과해서 탐관오리를 혼내주는 스토리. 1980년대 말에 노 전 대통령이 5공 청문회를 통해 권력의 맨 위에 서 있던 사람들에게 호통 치던 모습에서 대중은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노 전 대통령 역시 처음엔 돈이 전부였다가 세상의 부조리를 확인하고 인권에 눈을 떴다. 누구나 며칠이나 몇 주는 분노할 수 있다. 하지만 몇 년간 계속 분노하긴 힘들다. 그 뒤엔 깊은 성찰과 반성이 있었다는 뜻이다. 이런 이야기를 대중에게 들려주고 싶었다.”
-처음 감독에 도전했는데.
“원래 ‘변호인’은 웹툰으로 만들 생각이었다. 워낙 민감한 소재여서 대중적인 파워가 센 영화라는 장르로 만들기엔 무리라고 생각했다. 앞으로 10년은 흘러야 만들 수 있는 소재라 여겼다. 그런데 영화사 측에서 우연찮게 ‘변호인’의 스토리를 듣고 만들어보자는 제안을 해왔다. 독립영화 정도로 생각하고 시작했는데 (주인공 송우석 변호사 역에) 송강호씨가 캐스팅되면서 상업 영화로 덩치를 키우게 됐다. 감독 도전에 대한 부담은 없었다. 뭔가 결정되면 뒤를 돌아보는 스타일이 아니다.”
-‘변호인’의 어떤 점이 대중에게 어필했다고 보나.
“등장인물의 인간적인 매력이 가장 크지 않나 싶다. 그 분(노 전 대통령)을 생각하면 떠오른 시가 있다. 황지우 시인의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 거기에 보면 이런 시구가 나온다.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영화 속에서 송우석이 “이건 아니잖아요”라며 분노하는 건 여기서 온 대사다. 이 작품을 통해 보여주고 싶은 건 성찰과 반성의 힘이었다. 성찰과 반성이 없었을 경우를 대표하는 인물이 (학생들을 고문하는) 고문관 차동영(곽도원)이다. ‘변호인’은 우리사회에 분노와 증오를 불러일으키기 위해 만든 작품이 아니다. 성찰과 반성을 위한 작품이다. 이 점을 꼭 말씀드리고 싶다.”
-‘변호인’을 둘러싼 다양한 평가가 이어지고 있다. 가장 인상적인 평가가 있다면.
“많은 글들이 인상적이었고 나에게 감동을 줬다. 영화를 만들 때보다 오히려 요즘 더 많이 이 작품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변호인’과 관련된 분들끼린 이런 얘길 많이 한다. 이 작품이 살아있는 생물 같다고. 영화로 만들 작품이 아니었는데도 자기 힘으로 살아나서 제작자를 만나고 배급사를 찾아다니고…. 그렇게 살아있는 작품인 거 같다. 마케팅도 영화 자체가 직접 알아서 하는 거 같고.”
-민감할 수밖에 없는 소재를 다뤘다. 연출하면서 가장 주의한 부분 있을까.
“주의보다는 이 작품을 어떻게든 만들어야겠다는 신념이 필요했다. 왜 우리 사회는 이 분(노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가 극단적일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해봤다. 이유는 하나인 거 같다. 순진함.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 분이 순진해서 좋아하고, 싫어하는 사람들의 이유 역시 마찬가지다. 그게 한쪽은 찬양으로, 한쪽은 경멸로 갔다. 거듭 말하지만 난 이 분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건 ‘성찰’이었다고 본다. 우리도 그 분의 삶에서 이런 부분을 발견했으면 했다.”
-관객들은 ‘어디까지가 진짜일까’라는 생각도 많이 한다.
“나는 1%의 허구라도 섞였으면 그건 전부가 허구라 생각한다. 이 작품 역시 마찬가지다. 허구의 이야기다. 대신 노 전 대통령이 지녔을 실존적 고민은 훼손시키지 말자는 생각으로 임했다.”
-과거 시사회에서 이런 발언을 했다. “우리 역사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어떤 사건이나 인물을 통해 그 시대를 보는 것이다.” 노 전 대통령 외에도 특정 인물을 통해 다뤄보고 싶은 시대가 또 있다면 뭔가.
“너무 많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고(故) 김수영 시인을 들 수 있다. 자료도 많이 모아 놨다. 김수영 시인은 우리 사회의 1950~60년대를 대표하는 인물이지 않나. 그런데 워낙 심오한 분이어서 이 분을 어떻게 접근해야할까 생각하면 막막해진다. 이 외에 공상과학(SF)에 대한 관심도 많다. 가령 인간이 스스로 사랑을 통제할 수 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하는 생각. 다음 작품은 아마도 가벼운 이야기를 다루게 될 것 같다. 그게 영화가 될지, 웹툰이나 애니메이션이 될진 모르겠지만.”
-대학시절엔 어떤 학생이었나.
“88학번이었는데, 인문학적 관심과 호기심이 많았던 학생이었다. 과외도 많이 했다. 하지만 데모는 안 했다. 많은 분들이 많이 했을 거라 생각하지만 아니다(웃음). 나는 거시주의자여서 대세는 이미 (민주화로) 넘어왔다고 생각했었다.”
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