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한 쿡기자 - 전정희의 스몰토크]
1. ‘말은 바람이나 파도와 같고, 행위는 내용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2. ‘어리석은 사람은 무슨 일이 터지면 책임을 따지고 걱정만 하는데, 현명한 사람은 이를 계기로 이런 일이 이어지지 않도록 한다.’
3. 앞의 문장은 ‘장자’ 내편에 나오는 얘기입니다. 뒤는 현오석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말입니다. 앞의 문장을 좀 더 쉽게 설명하자면 ‘바람은 파도를 일게 하듯이 사람이 무언가 발언하면 사회에서 문제를 일으킨다. 그로 인해 생기는 결과는 일단 빚어지면 다시는 돌이킬 수 없다’는 뜻입니다.
뒤는 카드정보 유출로 온 국민이 전전긍긍하고 있는 시점에 그 책임에 대해 22일 현 부총리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현 부총리의 얘기가 고사와 차이 없을 만큼 훌륭해 보입니다.
4. 현 부총리, 거기서 그쳤으면 좋으련만 한 걸음 더나갔습니다. “금융소비자도 정보를 제공하는 단계에서부터 신중해야 한다. 우리가 다 정보 제공에 동의해 줬지 않느냐”고 말해 고사가 될 법할 문장을 돌이킬 없는 발언으로 만들고 말았죠. ‘임기응변의 논설’을 하려다 화근을 껴안은 겁니다.
5. 현 부총리는 24일 서울 남산 하얏트호텔에서 한국능률협회 주최로 열린 최고경영자조찬회에서 “말의 무거움을 느꼈다”며 다시 한 번 대국민 사과의 뜻을 전했습니다.
“정책을 담당하는 공직자는 합리적인 정책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국민의 마음을 잘 헤아리는 정책을 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며 “진의가 어떻든 간에 대상이 되는 국민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면 해명이 아니라 사과를 해야 한다”고 덧붙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사과의 뜻’이라고 말한 겁니다.
6. 현 부총리는 경제 문제 수장으로서 임기응변의 논설엔 명확하신데 상황 인식은 현격히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카드정보 유출로 인한 국민의 위기감이 ‘안보 위기’ 이상이라는 걸 참 모르십니다.
7. 우리가 은행계좌를 만들거나 카드를 발급 받으면서 제공하는 정보에 동의할 때 약관을 꼼꼼하게 읽어보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뭐 워낙 깨알 같아 잘 보이지도 않기도 하지만요. 한데 그 선뜻 나서는 ‘동의’에는 뭐가 담긴 줄 아십니까? 우리 사회에 대한 신뢰가 담겨 있습니다. 대한민국 금융사는 근대 금융이 시작된 이래 정부의 감시 속에 성장하여 ‘사회안전망’을 갖췄다고 본거죠. 이것이 ‘신뢰 프로세스’입니다.
8. 한데 현 부총리의 말이 독화살이 되어 국민 가슴에 날아 꽂힌 겁니다.
“우리가(국민 너희가) 다 정보 제공에 동의해 줬지 않느냐?”
9. 예를 들어 어린이집에 아이를 맡기는 학부모는 시설의 운영규칙 등에 ‘동의’합니다. 사회적으로 검증된 시설이기 때문에 신뢰해서입니다. 한데 정말 못된 어느 시설이 자녀를 구타하거나, 방기해 실종된다고 됐을 때 그 시설 원장이 현 부총리처럼 답하면 속에 천불이 날겁니다.
“아이를 맡겼을 때 시설이 책임 없다는 것을 학부모 너희가 동의하지 않았느냐?”
현 부총리의 논리가 바로 이와 같은 ‘임기응변의 논리’와 같다는 거죠.
10. 카드정보 유출 사태는 국가에 대한 신뢰가 무너진 겁니다. 따라서 위중하죠. 신뢰 붕괴의 책임은 현 부총리에 있고요.
11. 때문에 박근혜 대통령과 정홍원 총리가 나서 “책임자 처벌” 등 강력 조치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책임을 져야할 정부서열 ‘넘버 3’께서 그 책임이 국민에게 있다는 식의 ‘임기응변의 논설’을 하신다면 ‘그로 인해 생기는 결과는 일단 빚어지면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는 겁니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전정희 기자 jhje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