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호 동양대 건축소방행정학과 교수는 한국사회 ‘안전불감증’의 원인 중 하나로 정부의 일회성 대처를 꼽았다. 서해훼리호 침몰, 삼풍백화점 붕괴, 성수대교 붕괴, 씨랜드 화재, 대구 지하철 참사 등 대형 사고가 발생해도 정부 대처는 늘 ‘그 때뿐’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을 억울하게 보내고도 왜 고질적인 안전불감증은 사라지지 않을까. 재난방재 전문가 10명에게 물었다.
◇몰라서 못해요…교육·훈련시스템 미비=침몰하는 배에서 아이들은 “제자리에 있으라”는 안내방송만 철석같이 믿었다. 전문가들은 실생활에서 ‘안전 조기교육’이 이뤄지지 않는 현실을 안전불감증의 대표적 단면으로 꼽았다. 백민호 강원대 재난관리공학과 교수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안전에 대한 지식의 편차가 너무 크다. 일본 등 선진국은 국민 대다수가 일정 수준 이상의 지식을 갖고 있다. 재난이 발생하면 가족끼리 TV를 보며 슬퍼하는 데 그치지 않고 ‘가족 방재 회의’를 열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일본은 1995년 고베 지진 이후 ‘가정에서 시작하는 안전 교육’을 강조하고 있다. 백 교수는 “재난으로부터 국민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국가는 막연하게 ‘스스로 목숨을 지키라’고 말하는 대신 ‘어떻게’ 지켜야 할지를 교육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태환 용인대 특수재난연구소 교수는 체험을 통해 재난이 닥쳤을 때 스스로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고 봤다. 김 교수는 “삼풍백화점, 씨랜드, 성수대교, 대구 지하철을 계기로 어린이 안전체험관이 서울 어린이대공원, 보라매공원과 대구에 각각 생겼다”며 “어린이뿐 아니라 청소년, 일반인도 체험교육을 통해 안전을 학습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돼야 한다”고 분석했다.
형식적인 훈련도 문제다. 문종욱 한국화재소방학회 학술이사는 “소방서에서 상가나 건물 소방훈련을 실시하고 있지만 청소부 아주머니들만 참석하는 경우도 많다”고 지적했다. 김용곤 한경대 안전공학과 교수 역시 “안전 교육 제도는 있지만 실행이 안되는 게 문제”라며 “있을 수 있는 모든 실제 상황에 대비한 훈련이 절실하다”고 전했다.
◇공무원 만능주의와 처벌 온정주의=재난 현장을 관리감독 할 공무원들이 대부분 상황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비전문가’들이란 점도 문제다. 김태환 교수는 “재난 담당 공무원 대다수가 현장 경험이 없는 데다 그마저 비효율적인 조직 체계 탓에 제 역할을 못하고 있다”며 “재난 전반에 대응할 수 있는 조직이 없는 것도 문제”라고 말했다. 문종욱 이사도 “지방의 한 도시에서 지진 대피 훈련을 하면서 주민들을 지하주차장으로 대피시켰는데 알고 보니 내진설계가 안된 곳이었다. 각 시·군·구 유관 행정조직이 순환보직제로 운영되기 때문에 전문성을 갖춘 사람이 없는 상황”이라며 관리감독의 한계를 지적했다.
김재열 협성대 건축공학과 교수는 “무능한 ‘관피아’(관료+마피아)들의 끼리끼리 잔치가 끝나지 않는 한 사고는 계속된다”고 했고, 최윤철 청운대 건축설비소방학과 교수도 “이번 사고로 공무원들의 의식이 ‘무장해제’ 상태에 가깝다는 게 여실히 드러났다”고 지적했다.
국가 차원에서 전문가 수요를 전부 감당하기 어렵다면 민간 전문가를 길러내는 쪽으로 눈을 돌려야 한다는 얘기도 나왔다. 배천직 전국재해구호협회 차장은 “지역재난관리사 인증시험이 올해부터 시행된다”며 “국가 차원에서 민간 전문가 육성에도 힘써야 한다”고 말했다. 권성철 국제재난구조복지회 대표는 “생활 속 재난 대처 능력을 키워줄 교육 자체가 없었다”며 “지난해에야 겨우 재난예방관리사, 재난극복관리사 자격증이 생겼다”고 아쉬움을 표했다.
제도도, 예방도, 교육도 문제지만 사고는 늘 처벌 아닌 처벌로 마무리됐다. 수백명의 목숨을 앗아가는 대형사고가 반복됐지만 책임자들은 국민의 법감정으로 용인되지 않는 처벌을 받는 데 그쳤다. 김재열 교수는 “삼풍백화점 붕괴 등 90년대 초에 일어났던 대형 안전사고들이 충분한 처벌 없이 흐지부지 정상 참작 등으로 마무리됐다”며 “사고가 나면 원인을 분석해 일벌백계하고 반복되지 않도록 해야 하는데 ‘뒤처리’에 급급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고 전했다.
◇방재가 ‘비용’으로 치부되는 나라=세월호 침몰을 방지할 장치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무리한 개조를 막는 제도도, 과적을 막을 규제도 존재는 했지만 300여명의 목숨을 지켜내기에 충분하지 못했다. 전문가들은 안전 매뉴얼이 사실상 없는 데다 그나마 있는 매뉴얼이나 제도, 법 조항들도 유명무실하다고 꼬집었다. 김태환
교수는 “규제 완화 차원에서 ‘자율 안전’을 내세우며 안전 법규가 지나치게 완화됐다”면서 “벌칙 규정이나 강제 점검 기준이 많이 낮춰졌는데 이를 다시 강화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방재를 ‘비용’으로 여기는 분위기 역시 안전불감증을 조장하는 요인으로 꼽혔다. 이현호 교수는 “빨리빨리 문화에 익숙하다보니 안전을 지키고 느리게 가는 것이 손해라는 인식이 퍼져 있다”며 “안전을 따지다 공사가 늦어지고 비용이 더 발생하는 문제를 용인해야 한다”고 말했다.
홍기증 국민대 건설시스템공학부 교수는 “재난을 방지하려면 아직 발생하지 않은 가상의 상황에 대비해 돈을 투자해야 한다”면서 “그런데 우리는 발전에만 관심을 갖고 예방엔 인색하다”고 평가했다. 일어나지 않은 재난에 대한 예방 투자를 수긍해야 한다는 의미다. 백민호 강원대 재난관리공학과 교수도 “개개인이 안전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인다 해도 조직과 지역사회가 그 안전의식을 뒷받침하지 못하면 사고가 발생한다”며 “단기적으로는 재난안전관리에 비용이 발생하더라도 장기적으로는 조직의 지속적 발전과 경제적 효과로 이어진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그나마 이뤄지는 안전교육 역시 일회성 이벤트 형식으로 소비되는 경우가 많다. 백민호 교수는 “대부분의 안전교육이 ‘행사’ 성격을 띠고 진행된다”며 “교육이 사후 평가까지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드물다”고 꼬집었다.
‘냄비 근성’도 문제다. 홍 교수는 “세월호 참사로 깨달은 교훈들을 시간이 지난다고 덮어버려선 안 된다. 곳곳에서 언제라도 재난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지속적으로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도록 사회적 의식이 갖춰져야 한다”고 조언했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전수민 황인호 기자 suminis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