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질, 어디까지 겪어봤니?①] 방송국 앞에서 밤새고, 하염없이 대기하고… 가요계의 乙들

[갑질, 어디까지 겪어봤니?①] 방송국 앞에서 밤새고, 하염없이 대기하고… 가요계의 乙들

기사승인 2015-01-08 16:44:56
사진=국민일보 쿠키뉴스 DB / 사진과 기사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습니다

‘갑(甲)질’이 넘쳐난다. 땅콩 한 봉지 때문에 출발한 항공기를 돌리고, 주차 때문에 아르바이트생을 무릎 꿇린다. 대한민국이 아니라 ‘갑질민국’이라는 요즘, 알고 보면 갑질은 브라운관 속에도 있다. “갑질이 따로 없다니까요.” 가요계 ‘갑질’, 어떨까.

넘쳐나는 음악방송, 출연하기가 너무 힘들다

아이돌 그룹 A의 매니저는 매주 수요일이 되면 마음을 졸이며 핸드폰만 부여잡고 산다. 금~일요일까지 방송되는 지상파 3사 음악방송 출연여부가 아직 타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보통 인기 가수들의 스케줄은 활동 시작도 전에 이미 꽉 차 있는 것이 태반이지만,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의 3일은 꼭 비워놓는다. 지상파 음악방송 출연 여부를 확실히 알 수 없기 때문. 예를 들면 KBS ‘뮤직뱅크’는 금요일 오후 6시에 방송되지만 가수들은 자신의 출연 여부를 목요일 오전까지도 모를 때가 많다. 인기 그룹은 조기 섭외되지만, 그렇지 못한 가수들은 바로 전날 저녁에 출연을 통보받고 부랴부랴 방송을 준비하는 경우가 많다.

금요일에서 일요일까지의 3일만 비워놓는다고 해결되는 건 아니다. “다른 방송에 출연하지 않으면 음악방송에 출연시켜 주지 않겠다”는 으름장에 울며 겨자 먹기로 다른 일정을 취소하고 방송 일정에 가기도 한다. 가수의 신뢰도는 하락하지만 어쩔 수 없다.

매니저들은 본인이 맡은 그룹이 컴백하기 2~3주 전부터 방송국 작가실 문턱을 마르고 닳도록 드나든다. 새로 나올 앨범과 선물, 간식거리를 바리바리 싸 들고 방송국을 한바퀴 순회하며 “잘 부탁한다” “곧 컴백한다”는 인사를 수백 번도 더 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 나간 음악방송 녹화도 만만하지는 않다. 5인조 아이돌 그룹 B의 경우 음악방송이 있는 날이면 오전 4시에 일어나 미용실에서 부랴부랴 메이크업을 받은 후 오전 6시까지 방송국에 도착해 대기한다. 방송국 사전녹화시간을 맞추기 위해서다. 지상파 음악방송들은 모두 오후 늦게 방송을 시작하지만 아이돌 그룹들은 무조건 오전에 출근해 하염없이 대기한다.

“사전녹화시간까지만 도착하면 되지 않냐”고 물으니 B그룹의 매니저는 손사래를 친다. 그러다 늦기라도 하면 “다음주에 출연하고 싶지 않냐”며 경을 친단다. 녹화를 마쳤다고 끝나는 건 아니다. 본 방송시간까지 대기했다가 자신들의 녹화분이 방송될 때 무대에 올라 그때까지 기다려 준 팬들에게 인사를 하고, 방송을 끝낸 제작진에게 공손한 인사까지 마쳐야 그날의 일정이 끝난다. 숙소에 돌아가는 시간은 빨라도 밤 9시다. 강행군이 따로 없다. 일주일 중 하루의 방송을 위해 매니저부터 아이돌까지, 5분 대기조가 돼야 한다.

오빠 얼굴 보기가 너무 힘이 드네요

그렇다면 그 가수들을 좋아하는 팬은 어떨까. 금요일 ‘뮤직뱅크’에 나오는 아이돌 그룹 C의 사전녹화시간이 아침 8시라면 C의 팬들은 아침 7시까지 모여 줄을 선다. 그러나 관람인원은 제한돼 있고, 대부분 선착순 입장이다. 팬들은 얼마나 방송국 앞에 일찍 모일까? 놀랍게도 이들은 전날부터 밤을 새워 줄을 선다. 매주 주말 저녁이면 방송국 근처에서 밤을 새우는 10~20대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1초라도 줄을 빨리 서서 조금이라도 더 ‘오빠’를 보고 싶은 욕망 때문에 이런 고생을 자처하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끝난다면 ‘갑질’은 아니다.

방송국은 이들의 소위 ‘빠심’을 이용해 방송을 만든다. 음악방송 보겠다고 아침에 모인 팬들은 오후까지 다른 녹화에 방청객으로 동원된다. 아이돌 그룹 C의 팬이라는 김모(23)씨는 이런 방식이 지긋지긋하다고 토로했다. “아침 7시에 C가 사전 녹화를 시작하니 새벽 5시30분까지 모이라고 해서 모였어요. 첫차도 다니지 않는 시각이니 방송국 앞에서 밤을 샜죠. 7시에 시작한다던 녹화는 9시30분까지 지연됐고, 그마저도 다른 가수들이나 전혀 다른 프로그램의 녹화를 몇 개나 저희를 동원해 진행하고 나서야 C를 볼 수 있다더라고요.” 다른 녹화에 동원되다가 중간에 화장실이라도 갈라 치면 경호원들은 “C의 팬들은 예절이 없으니 앞으로 방청을 못하게 하겠다”며 막았다. 결국 이씨는 밤을 샌 채로 다른 녹화를 세 개나 보고서야 겨우 C의 녹화를 볼 수 있었다.

“한 번은 화장실이 너무 급해서 C의 녹화를 못 봐도 좋으니 보내달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녹화를 진행하던 스태프가 ‘이런 식으로 녹화에 불편을 주면 C의 방송 활동에도 불이익을 주겠다’고 으름장을 놓더군요. 좋아하는 게 약점인 줄 그 때 처음 알았어요.”

“연말시상식의 경우는 더 심하다”고 김씨는 분통을 터트렸다. 한 지상파 방송국은 2014년 연말 해당 방송사의 가요 시상식 입장권을 내부 직원들에게 상여금 대신 지급했다. 사내 행사 입장권이 어떻게 상여금 대신이 될 수 있냐고 물으니 김씨는 “방송국 직원들이 아이돌 가수 팬들에게 그 티켓을 팔아 연말 상여금을 충당한다”고 말했다. 중고 거래 까페 등에서 연말 가요 시상식 입장 티켓은 50만원에서 90만원까지의 높은 금액으로 거래된다.

“정말로 그 가격에 방송국 입장권을 사는 사람들이 있냐”라고 물으니 김씨는 “그 돈을 주고서라도 보는 팬들이 있다”고 말했다. 문제는 이를 묵인하는 방송국의 태도라고 김씨는 지적했다. 티켓이 중고거래되는 것을 알면서도 방치한다는 것. 그 와중에 악덕 암표업자들까지 가세해 가짜 티켓을 고가에 구입한 팬들도 있다.

이은지 기자 rickonbg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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