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한 쿡기자] ‘황희 발언’ 김진태, 왕만 알고 조정(朝廷)은 모르는 ‘반쪽’ 역사지식

[친절한 쿡기자] ‘황희 발언’ 김진태, 왕만 알고 조정(朝廷)은 모르는 ‘반쪽’ 역사지식

기사승인 2015-04-23 12:08:55
황희 정승. 국민일보DB


"[쿠키뉴스=김현섭 기자] 새누리당 김진태(사진) 의원의 이완구 국무총리와 관련된 이른바 ‘황희 발언’이 논란입니다.

김 의원은 21일과 22일 CBS, PBC 라디오에 잇따라 출연해 이 총리의 ‘낙마’ 사례를 거론하면서 “조선시대 명재상으로 추앙받는 황희 정승이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간통도 하고 무슨 참 온갖 부정청탁에 뇌물에 이런 일이 많았다는 건데 그래도 세종대왕이 이분을 다 감싸고 해서 명재상을 만들었다”고 말했습니다.

인물을 키우기 위해선 웬만한 잘못은 덮어줘야 한다는 취지입니다.

황희(1363년 3월 8일~1452년 2월 28일) 정승의 과오에 대한 기록은 세종실록 9년(6월 17일), 10년(6월 25일), 12년(11월 24일) 등에 나옵니다.

다 인용하면 너무 길어지기 때문에 이 중 12년(1430년) 11월 24일 3번째 기사(국역) ‘사헌부에서 황희의 파면 추방을 건의하니 관직을 파면하다’를 보겠습니다.




<사헌부에서 상소하기를, “신 등이 황희(黃喜)가 청탁한 죄에 대하여 상소로 갖추어 보고하였사오나, 전하께서는 대신을 끊는 것을 어렵게 생각하시와 곧 허락하지 아니하시오니 깊이 유감스럽사옵니다. 신 등은 생각하기를, 지난번에 희는 그의 사위인 서달(徐達)의 죄를 면하기 위하여 이수강(李守剛)과 곽규(郭珪) 등과 내통하여 죄 없는 사람에게 화를 끼칠 뻔했다가 일이 발각되매, 이수강과 곽규 등이 모두 그 잘못을 자백하였습니다. 전하께옵서는 희가 대신이기 때문에 차마 죄를 다스리지 아니하시고 특별히 복직을 명하셨습니다. 전하께서 희를 대우하심에 있어서 은혜가 지극히 우악하셨고 예가 극히 융숭하셨사오니, 마땅히 송구한 태도로 잘못을 고치어 전하께서 애써서 대우하시는 은혜에 보답해야 할 것인데 이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또 태석균(太石鈞)의 문제를 이심(李審)에게 부탁한 바, 심은 희의 말을 듣고 그것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거침 없이 말을 들어 주었으니, 이는 희로 인하여 법을 굽힘이 환하게 나타났습니다.

이것은 전하께서는 대신으로 희를 대우하셨는데, 희는 대신의 도리로 전하께 보답하지 아니한 것입니다. 전하께서 아무리 관직에 머물러 있기를 명하시더라도 희가 무슨 낯으로 조정에 서서 여러 사람들이 모두 우러러 보는 자리에 있겠습니까. 또한 대신의 권한을 잡은 사람의 청탁에 대하여, 만일 지사(志士)가 아닌 다음에 누가 감히 따르지 않겠습니까. 고려 말년에 권력이 대신에게 있었기 때문에 대간이란 자들도 대신이 시키는 대로 따라서 옳고 그른 것을 혼란시켜서 그 폐해가 매우 컸습니다. 죄 있는 자가 도리어 벌을 면하고 무고한 자가 도리어 함정에 빠졌습니다. 크게 어지러운 것이 극심하였으니 한심하다 할 수 있습니다. 석균(石鈞)의 일은 굽힌 것이 비록 작지만, 이런 문제를 그대로 버려 둔다면 신 등은 청탁에 의하여 법을 굽히는 징조가 이제부터 시작되어 금할 길이 없을까 염려되오니, 이런 것은 빠른 기간 중에 밝혀야만 될 것입니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그를 파면 추방하시고 다시는 등용하지 마시와 청탁과 법을 굽히는 징조를 막으시옵소서.” 하니, 명하여 희의 관직을 파면하였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황희는 의정부 좌의정 겸 판이조사이던 1427년(세종 9년)에 자신의 사위 서달이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 사건이 일어나자, 서달을 비호·방면하는데 압력을 행사한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이에 사헌부(司憲府)의 탄핵을 받아 ‘파면’에 이릅니다.

<좌의정 황희와 우의정 맹사성과 형조 판서 서선(徐選)을 의금부에 가두도록 명하였다. 사연은 서달(徐達)이 신창(新昌)의 아전을 죽인 사건에 연루된 것이었다> (세종 9년(1427년) 6월 17일 세 번째 기사.)

하지만 김 의원의 말대로, 그리고 위 실록에도 나오듯(‘전하께옵서는 희가 대신이기 때문에 차마 죄를 다스리지 아니하시고 특별히 복직을 명하셨습니다’), 그는 세종의 두터운 신임 하에 한 달 만에 복직합니다.

그런데 황희는 3년 후(세종 12년·1430년)에 재물손괴, 근무태만 등으로 투옥된 제주도 감목관 태석균을 감싸주기 위해 해선 안 될 관여를 하다가 다시 사헌부의 탄핵을 받습니다. 그리고 세종은 고심 끝에 또 황희를 파면합니다. 그리고 다음 해 9월에 영의정부사로 돌아옵니다. 이후로는 18년 간 국가의 태평성대를 잘 이끌죠.

이처럼 명재상이던 황희 역시 잘못을 저지른 것에 대해서만큼은 조정(朝廷)의 시선이 극히 부정적이었고, 그를 신임하던 왕도 이런 신(臣)들의 요구를 무시할 수 없어 차후에 능력에 초점을 맞춰 복직시킬지언정, 일단은 그에게 ‘파면’이라는 대가를 내렸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황희 정승에 대한 과오 관련 기록은 이 총리가 명쾌한 해명을 내놓기는커녕 일국의 총리로서 “목숨을 내놓겠다”는 극단적 발언에 잦은 이어지는 정황에 잦은 ‘말 바꾸기’로 금품수수 의혹만 더 키우고, ‘충청도 말투’ 핑계나 대며 국민을 우롱하는 듯한 이 시점에서 댈 수 있는 비유로서는 대단히 부적절하다는 겁니다.

더구나 장수황씨(長水黃氏) 대종회는 22일 “황희 정승에 대한 갖가지 의혹이 실록에 나와 있긴 하지만 그 기록 자체의 신뢰도에 대한 논쟁이 있는데다 한문 번역상의 문제라는 비판이 꾸준히 제기돼 왔다”면서 “실제 황희 정승과 관련된 부분이 편찬되던 당시에도 다른 사관들 사이에서 ‘금시초문인 주장이 포함됐다’는 비판이 있었을 정도”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황희는 나라의 미래를 내다보는 판단력을 가지고, 왕권 국가였던 시대에 왕에게 아닌 건 아니라고 분명히 말하는 능력과 소신을 겸비한 정치가로 당대의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현 시점에서 이 총리를 황희와 비유한다는 것도 선뜻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김 의원이 굳이 이 총리와 관련해 황희 정승을 빗대어 뭔가 말하고 싶다면 박근혜 대통령에게 개인적으로 ‘그래도 훌륭한 분이니 나중에 꼭 자리 하나 내달라’는 부탁 정도일 겁니다. 시대가 변해 그것도 가능할진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afero@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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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섭 기자
afero@kmib.co.kr
김현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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