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우성의 커피소통⑱] 나폴레옹과 치커리커피

[최우성의 커피소통⑱] 나폴레옹과 치커리커피

기사승인 2016-10-06 14:40:09

1806년 10월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이끄는 프랑스군이 독일의 베를린에 입성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폴레옹은 영국의 경제제제를 의미하는 대륙봉쇄령을 공포한다.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 해군은 세계 4대 해전 중의 하나로 알려진 1805년 트리팔가 해전에서 22척의 배가 파괴되거나 나포되는 참패를 겪었다. 이후로 해상권은 영국이 장악하게 되었고, 프랑스군은 해군이 아니라 육군에 치충하게 되었다.

당시 유럽은 산업혁명의 결과로 엄청나게 많은 물자가 필요했는데, 대부분의 물자가 영국이 배로 가져오는 것들이었다.

그런데 나폴레옹은 영국을 정복하는 길이 막히자, 영국을 무력화하기 위해서 대륙봉쇄를 감행한 것이다. 그 내용은 유럽대륙 내 나라들의 영국과의 무역금지, 영국 배의 대륙항구 기항금지, 영국배의 몰수조치 등이다. 이 조치는 영국에 큰 타격을 주었다. 유럽으로부터 전등에 쓸 양초를 수입하지 못한 영국 런던의 밤거리는 당장에 암흑의 천지가 되었다. 영국은 재빠르게 다른 대안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가스를 사용한 가로등이었다.

나폴레옹의 의도대로 대륙봉쇄는 영국을 힘들게 만들었지만 물품 수입의 길이 막힌 유럽의 국가들의 원성은 더 커져가기만 했다. 유럽의 국가들도 손을 놓고만 있지 않았다. 그들도 대안을 찾기 시작했는데, 사탕무를 통한 설탕의 제조기술이 그 중의 한가지이다. 이전에는 설탕수입을 영국에 의존하고 있었는데, 사탕무에서도 설탕을 추출하는 기술을 발견함으로 설탕의 수요를 어느 정도 대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커피의 경우는 그 대안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특히 나폴레옹 커피의 애호가로 알려져 있는데, 그가 지속적인 위장병으로 고생했던 이유도 지나치게 커피를 마셔서이지 싶다. 프랑스인들의 큰 사랑을 받고 있던 커피가 수입이 안 되니 나폴레옹도 곤란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찾은 대안이 치커리 커피였다.

그 이전에 치커리는 아무 맛도 없고 영양성분도 대단한 것이 없다고 여겨져, 길가에 아무렇게나 자라나는 그저 그런 식물이었다. 커피처럼 카페인이 없어서 각성효과도 기대할 수 없었지만, 궁해진 나머지, 커피처럼 강하게 볶아 끓여 마셔보니 제법 커피 대용품으로 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대륙봉쇄의 결과로 만들어진 커피 대용품 치커리커피의 운명은 이후에 어떻게 되었을까? 질 좋은 커피가 많이 생산되고, 수입과 수출이 자유로운 오늘날도 많은 지역에서, 심지어 유명한 커피의 생산지에서도 치커리는 커피와 적당한 비율로 섞여 판매되고 있다. 아마도 오랜 동안 길들여진 식감과 역사 속에 자리 잡은 치커리문화의 결과라고 생각된다.

글=최우성(인덕대 외래교수. 커피비평가협회(CCA) 서울 본부장, 웨슬리커피 LAB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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