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뉴스=이준범 기자] 한국 드라마, 혹은 영화에서 그려지는 역사 속 인물은 대부분 겹친다. 100원 동전에 그려진 이순신과 1만원 지폐에 그려진 세종대왕의 이야기가 드라마, 영화로 그려진 건 이미 여러 번이다. 정조와 사도세자, 장희빈의 이야기도 우리에게 익숙하다. 최근에는 우리 역사를 배경으로 새로운 인물을 창조하는 퓨전 사극이 유행이기도 하다.
하지만 유독 5만원 지폐에 그려진 신사임당은 작품에서 찾아보기 어려웠다. 드라마화 되기 어려운 인물로 첫 손가락에 꼽히기도 했다. 오는 26일 첫 방송을 앞둔 ‘사임당 빛의 일기’ 제작진은 사임당을 소재로 선택한 과정에 대해 털어놨다.
17일 오후 2시 서울 목동서로 SBS 사옥에서 열린 SBS ‘사임당, 빛의 일기’ 기자간담회에서 박은령 작가는 “조선의 워킹맘을 그리고 싶었다”고 신사임당을 주인공으로 삼은 이유를 밝혔다. 박 작가는 “사극으로 만들기 가장 어려운 인물로 신사임당이 꼽힌 기사를 봤다”며 “그 기사가 오히려 나를 자극했다. 뭔가 있을 것 같아서 도전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뭔가 있었다. 박 작가가 찾아낸 자료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신사임당의 이미지와 전혀 다른 모습이 많았다. 박 작가는 “먼저 사임당이 살았던 50년이 안 되는 시간 동안 그려낸 작품수가 어마어마하게 많았다”며 “그녀는 산수화로 일가를 이룬 인물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초충도는 지금까지 살아남은 그림일 뿐이다”라고 말했다.
또 “지금 신사임당의 이미지는 18세기 이후 성리학 담론이 견고해지면서 고착된 이미지”라며 “사임당이 살던 시대는 그렇지 않았다. 유산도 딸 다섯에게 똑같이 했고, 결혼한다고 해도 자신의 재산을 남편과 섞지 않았다. 사임당의 어머니도 법률지식이 많아 동네에서 상담을 많이 해주는 분이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조선시대나 지금이나 워킹맘의 삶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라며 “자신의 예술을 구현하면서 가정 경제를 이끌며 사는 여성의 속은 분노하고 있지 않았을까 싶었다. 그 점에 주목해보고 싶었다. 채워지지 않은 빈자리가 많다고 생각했다”고 전했다.
박 작가는 ‘사임당 빛의 일기’의 대본을 쓸 때 두 가지 모티브에서 시작했다고 말했다. 하나는 우연히 읽게 된 18세기 여인의 비망록에서 얻었다. 결혼 6년 만에 과부가 된 여자가 병세 깊어진 남편을 지켜보며 쓴 내용을 읽으며 “이 사람의 손을 잡아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현대를 살아가는 여성이 과거에 살던 여성의 이야기를 읽으며 위로해주는 이미지를 떠올린 것이다.
또 하나는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얻었다. 시놉시스를 쓰던 시기에 재밌게 본 ‘인터스텔라’에서 딸을 찾고 싶어 하는 아버지가 그녀의 책장 뒤 다른 세계에 있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박 작가는 “현대의 서지윤과 과거의 사임당을 시공간이 엇갈린 뫼비우스의 띠처럼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두 모티브를 통해 하늘에 사무치는 간절한 마음, 간곡한 이야기를 누군가 들어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은 이미지를 떠올려 드라마에 담았다. 최근 타임슬립을 소재로 한 드라마가 많아진 것에 대해서는 “3년 전부터 준비했는데 서운하다”고 밝히기도 했다.
30부작으로 사전제작 된 ‘사임당 빛의 일기’에는 사임당의 새로운 면모나 과거와 현대가 교차하는 것 외에도 풍성한 내용이 담겼다. 모차르트와 살리에르의 관계를 떠올리게 하는 사임당과 휘음당(오윤아)의 관계도 있고, 자신도 언젠가 연산군처럼 폐위당하지 않을까 숨죽여 살아가는 중종의 이야기도 다뤄진다. 특히 제작진이 “제발 그림 좀 그만 그리자”고 박 작가에게 전화했을 정도로 힘들게 찍었다는 산수화도 여러 번 등장해 영상을 아름답게 수놓을 예정이다.
배우 이영애와 송승헌이 주연을 맡아 100% 사전제작이 완료된 ‘사임당 빛의 일기’는 SBS 월화드라마 ‘낭만닥터 김사부’의 후속으로 오는 26일 오후 10시 첫 방송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