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지난 1938년 제국주의 실현을 꿈꾸던 일본은 '국가총동원법'에 따른 국민 총동원령을 제정했다. 식민지였던 조선에도 여파가 미쳤다. 일본은 모집·관 알선·징용 등으로 형태를 바꿔가며 조선인을 강제 동원했다. 국내를 비롯해 일본, 사할린, 남양군도로 800만명이 끌려갔다. 이들은 원치 않는 총을 들어야 했고, 노역에 시달려야 했다. 이중 최소 60만명이상은 죽거나 행방불명됐다.
국가는 이들을 어떻게 기록하고 있을까. 79년의 세월이 흘렀다. 역사는 흐려졌다. 교과서는 단 한 문단으로 피해자의 삶을 축약했다. 이들을 기리기 위한 동상 건립은 정부의 불허로 난항을 겪고 있다. 진상규명과 피해보상 역시 지지부진하다. 백발이 성성한 피해자들은 지금도 지팡이를 짚고 국회와 법원을 오간다.
쿠키뉴스 기획취재팀은 지난 4월부터 강제 동원의 역사와 의미를 재조명하고자 취재를 시작했다. 전국을 돌며 피해자와 유가족을 찾았다. 일본을 방문, 비극의 흔적을 되짚어봤다. 쿠키뉴스 기획취재팀은 94세의 피해자를 대신해 "우리를 잊지 말아달라"던 그의 간절한 당부를 독자들께 전한다.
‘강제동원을 어떻게 기억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서 시작한 기획. 그러나 우리는 끝내 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어떻게’는커녕 기억할 준비조차 되어있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라는 물음은 쿠키뉴스 기획취재팀 기자들의 가장 큰 고민이었습니다.
광복 후 72년이 지났지만, 강제동원 문제는 그 어느 것도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피해자들은 사과 받지 못했습니다. 한국과 일본 정부 모두 이들의 피해를 보상하지 않았습니다. 일부 위로금이 지급됐지만, 이들의 고통을 치유하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강제동원 관련 자료 조사와 진상규명을 위한 인력은 턱없이 부족한 상황입니다.
취재 기간 가장 자주 느꼈던 감정은 죄스러움이었습니다. 피해자 취재가 특히 그랬습니다. 아픈 기억을 헤집는 질문을 해야 할 때면 그들의 눈을 바라보기 힘들었습니다. 아흔이 넘은 피해자들이 눈물과 서러움을 쏟아내는 상황은 아무리 반복해도 무뎌지지 않았습니다.
쿠키뉴스 기획취재팀이 문제를 지적한 노동자상, 피해자 명부, 강제동원 역사관, 교과서 등의 취재는 답답함의 연속이었습니다. 정부 기관 관계자는 대답을 회피하고 책임을 떠넘기기 일쑤였습니다. 우리 정부의 무책임하고 무관심한 대응은 피해자와 유가족의 한숨을 이해하기 충분했습니다.
정부의 외면 속에서 국내·외 시민·사회단체는 여전히 고군분투하고 있습니다. ‘태평양전쟁피해자 보상추진협의회’는 강제동원 배상책임 관련 대법원의 최종 판결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전재진 우키시마호진상규명협회 회장은 우키시마호 참사를 알리기 위한 영화 제작을 준비 중입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식민지역사박물관’을 건립할 예정입니다. 일본 시민단체인 ‘나고야 미쓰비시 조선여자근로정신대 소송을 지원하는 모임’과 ‘제2차 후지코시 강제연행·강제노동 소송을 지원하는 호쿠리쿠 연락회’ 등은 전범 기업인 미쓰비시와 후지코시 본사 앞에서 매주 또는 격주로 피해자에 대한 사과와 보상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피해자 대부분은 아흔을 넘긴 고령입니다. 피해 사실을 증언할 목소리는 점점 잦아들고 있습니다. 과거 정권을 탓하고만 있을 수 없습니다.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지 못한 잘못, 그 8할은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있습니다.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듣고 그들의 아픔에 공감해주는 것, 종국에는 국가가 그들의 역사를 제대로 기록하는지 지켜보는 것, 모두 우리의 할 일입니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우리 사회의 지속적인 관심이 전해지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지난 4월, 따뜻한 봄에 시작했던 강제동원 취재는 서늘한 바람이 부는 가을이 돼서야 끝을 맺습니다. 열여덟 번의 기사가 나가는 동안 [강제동원 지워진역사]에 관심을 갖고 지켜봐 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 인사를 전합니다. 취재에 응해주신 피해자와 유가족에게 각별한 사의를 표합니다. 고맙습니다.
사진 박효상, 박태현 기자 tina@kukinews.com
영상 윤기만 adrees@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