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1~23일 조합원 직접투표로 치러진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 임원선거에서 단독 출마한 나순자 후보(53)는 3만2414명의 지지를 받아 신임 위원장으로 당선됐다. 박노봉(56) 후보는 수석부위원장에, 한미정(48) 후보는 사무처장으로 임명됐다. 보건의료노조 8기 집행부는 향후 이들을 중심으로 여러 활동을 펼 예정이다.
당선이 확정된 지 닷새 후인 28일 쿠키뉴스는 나순자 당선인을 단독 인터뷰했다. 나 당선인의 첫 인상은 부드러웠다. 사진기자의 까다로운 요청에도 그는 퍽 훌륭하게 포즈를 취했다. 그는 예정돼 있지 않은 날선 질문에도 유려한 대답을 내놓곤 했다. 나 당선인의 은은한 미소와 강단 있는 ‘말’은 매번 기자를 내심 당황하게 만들었다.
수십 년 ‘노조’를 향한 색깔론과 편견에 맞서 싸우며 다진 유능제강(柔能制剛, ‘부드러움은 강함을 이긴다’는 뜻)의 기질은 난공불락의 요새와도 같았다. 흥미로웠다. 쿠키뉴스는 2회에 걸쳐 나 당선인과의 단독 인터뷰를 전한다. 다음은 일문일답.
- 조합원으로부터 94.8%의 지지를 받았다.
현 지도부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도 일부분 반영돼 있었을 것이다. 유지현 전 위원장과 7기 집행부는 이명박·박근혜 시대 9년동안 힘든 투쟁을 많이 해왔다. 의료민영화·진주의료원 폐업·성과연봉제 등의 저지 투쟁을 하는 동안 조합원들이 ‘7기 지도부가 잘 싸웠다’고 평가한 것 같다. 내년은 산별노조 설립 20주년이 되는 해다. 이 세월동안 보건의료노조가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통해 산별노조로써 연대와 평등을 실현하려했던 노력이나 병원 노동자들로서 국민들과 함께 하려했던 의료공공성 강화 투쟁의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8기 지도부의 공약 및 사람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도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 당선인 공약의 핵심은 무엇이었나.
‘저지의 시대에서 쟁취의 시대로 가자’는 것. 그간 ‘저지’하는 투쟁을 많이 해왔다. 그러면서도 현장의 인력 문제 및 갑질문화 근절 등 보건의료노조가 추구해야할 과제를 천명해온바 있다.
- ‘실질적인 변화’를 추구하겠다는 의미로 이해해도 되나.
그렇다. 사실 의료기관 사이에 경쟁이 심화되면서 병원들은 돈벌이에 혈안이 돼 있다. 이에 따른 고통은 노동자들에게 전가된다. 각 병원들이 돈벌이 추구에만 천착하는 게 아닌, 의료전달체계를 제대로 확립해 병원별 각각의 특성을 제대로 살릴 수 있는 병원을 만들자는 우리의 철학에 대해 조합원들은 지지를 보내고 있다.
- 5만 여 명 조합원들의 대표로서 어깨가 무거울 것 같다.
조합원들에게는 일하기 좋은 일터를 만드는 실질적인 변화를, 국민들에게는 돈이 없어도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의료체계를 수립하는데 그 역할을 다 하고 싶다.
- 보건의료노조가 보건의료 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 환경 개선에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보는가.
그동안 ‘노동 존중·환자 존중·직원 존중’의 3대 캠페인을 펼쳐 왔다. 그 결과 병원내 폭언·폭력이 과거에 비해 감소했다. 병원 구성원들의 인식 변화도 이뤄졌다고 판단한다. 그러나 실질적인 변화, 즉, 존중받고 일하기 좋은 일터를 만들어야 한다. 이번 을지병원 투쟁이나 성심병원 사례를 통해 보건의료계 조직 문화가 실제 어떠한지 일부 드러났다. 현장은, 그러나 훨씬 심각하다. 임기 중에 이러한 노동 실태를 매우 구체적으로 드러낼 것이다. 병원내 불합리함을 근절키 위한 범국민운동을 펴야 환자들에게도 궁극적으로 좋은 의료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사안별 대응만큼이나 화수분처럼 터져 나오는 보건의료계의 온갖 적폐를 근본적으로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사회적 이슈화와 여론의 지속 시간은 짧다. 매년 조합원들을 대상으로 2~3만부 가량 설문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설문조사를 더 구체화시키면 여러 문제가 드러나게 된다. 이러한 의견을 수렴해 노사교섭 요구안으로 만드는 방법을 고려 중이다. 내년에 산별 교섭이 복원된다. 이러한 문제제기를 산별교섭을 통해 제기하고 여기에 사회적 이슈가 맞물려 이뤄져야만 전반적이고 세부적인 문제 해결이 가능하다.
- 정리하면, 현장의 목소릴 협상 테이블로 가져오겠다는 건가.
사비로 물품을 구입하거나 장기자랑 같은 문제가 조합원 입장에선 매우 고통스런 일이었을 것이다. 을지병원 파업과 성심병원 간호사 장기자랑 논란을 거치면서, 여러 불합리한 일들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당연히 개선 필요성도 강하게 제기됐다. 불합리를 합리로 바꿔내야만 조합원들이 병원에서 제대로 환자를 돌볼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대국민 홍보를 펼쳐 나가면 세부적인 문제들도 들춰낼 수 있을 것으로 본다.
◇ 노조 없는 병원일수록 노동 환경은 ‘끔찍’
- 보건의료노조는 그동안 어떤 일들을 해왔나.
과거 병원에서 TV를 보려면 동전을 넣어야 했다. 노조 초창기에는 ‘TV 무료 시청하기’ 운동을 펴 이를 없앴다. 또한 병원에 보호자 침대가 구비돼 있질 않아 보호자들은 환자와 끼여서 자거나 의자에서 쪼그려 밤을 지새우곤 했다. 보호자 침대역시 노조의 요구로 마련됐다. 노조가 있는 병원이 설치를 하니, 타병 원으로 확산됐다.
또한 2005년 이전만 해도 암 환자가 있으면, 가정 경제가 파탄나기 일쑤였다. 당시 참여정부는 보건의료노조의 암 무상의료 요구안을 받아들였다. 그 결과 암 환자들의 병원비 90%를 건강보험에서 보장해주는 쾌거를 이뤄낼 수 있었다(현재 암 환자의 본인부담금은 5%대다).
아울러 2009년부터 ‘보호자 없는 병원’을 목표로 국회를 통해 시범사업 시행 등을 진행케 하는 등 상당히 노력을 기울였다. 현재는 간호간병통합서비스로 정착됐다. 문재인 정부에서는 2020년까지 10만 병상으로 확대·운영키로 했다. 이렇게 되면 국내 전체 병상의 절반은 보호자 없는 병상이 된다. 이렇듯 보건의료노조는 항상 국민들의 건강과 환자들의 편의를 위해서 노력해왔고, 실제 뚜렷한 성과도 내왔다.
- ‘보건의료노조는 이런 일을 하는 곳이다’라고 한마디로 정리한다면.
병원에서 환자들이 안전하고 편안하게 질 높은 의료서비스를 받으려면 여건 조성이 필요하다. 병원노동조합은 이런 환경 조성을 위해 일한다.
- 이른바 ‘문재인 케어’에 대해 어떤 입장을 갖고 있나.
문재인 케어의 보장성 70% 목표는 부족하다고 본다. 80%까진 가야 한다. 그래야만 실질적으로 국민들에게 도움이 된다. 80%로 건강보험 보장성을 확대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비급여의 전면 급여화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정부에서 적정 의료수가를 통해 보장을 하겠다는 발표에도 불구하고, 의사단체는 문재인 케어를 반대하고 있다. 이러한 반대는 ‘국민들의 생명보다 자신들의 밥그릇 챙기기가 우선’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 노조가 없는 병원이 아직 많은데.
지난 3년 동안 대학병원 중에서 을지대병원, 동국대병원, 건양대병원 등의 노조를 설립하면서 놀란 적이 많았다. 노조가 없는 병원의 노동 환경은 정말 심각하더라. 이들은 오랫동안 억눌려 있었기 때문에 노조가 생기면 정말 열심히 활동한다. 대표적인 게 을지병원 파업이다. 걱정 없이 장기 파업을 성공리에 끝낸 경험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무래도 파업이 길어지면 조합원들이 경제적으로 힘들기 때문에 복귀하거나 조직도 흔들리기 마련이다. 그러나 을지병원은 견고했다. 그동안 얼마나 직원들이 참아왔는지를 보여주는 반증이었다.
대학병원 중 삼성 및 성심 계열을 제외하면 대부분 노조가 설립돼 있다. 춘천성심병원은 복수노조가 생긴 이후 많이 위축돼 있었지만, 금번 간호사 장기자랑 논란이 터진 후 많이 바뀌었다. 언론 보도는 잠시 흘러 지나가지만, 내부에서 감시하고 견제하지 않으면 개선이 되지 않는다. 직장갑질119에 참여한 이들을 ‘성심 밴드’로 묶어 가입시켰다. 굉장히 많은 수의 노동자들이 ‘성심 밴드’에 들어왔다. 그리고 이들은 성심병원 노조 설립의 초석이 됐다.
- 몇 명이나 성심병원 노조에 참여할까.
춘천성심병원노조는 2011년 조합원이 200여명에 이르렀지만, 사측이 복수노조를 만들어 탈퇴를 시켰다. 마지막 남은 10명 7년 동안 버텼다. 이번 간호사 장기자랑 사건이 터지면서 다시 가입을 시켜서 조합원이 300명까지 늘어났다. 그러나 병원 측에서는 또다시 탈퇴시키려고 하지만 견고하게 버티고 있다. 강동성심병원은 재단 이사장의 동생이 운영하는 별도의 의료법인이라 노조 설립이 용이치 않아 일단은 미뤄둔 상태다.
강남·동탄·한강·한림 성심병원에서 4000여명의 직원들이 가입하는 노조가 만들어지게 됐다. 4군데 모두 노조 조직을 구성 중이다. 이번 성심병원 사태는 병원내 갑질문화가 사회적으로 회자되고, 온라인으로 노동조합이 없는 병원의 노조설립을 기틀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시사한 바가 크다(보건의료노조 한림대학교의료원 강남·동탄·한강·한림 성심병원 지부가 이달 1일 한림대의료원지부 설립총회를 진행했다. 지부장은 영상의학과 채수인 조합원이 선출됐다). (계속)
김양균 기자 angel@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