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지 않은 설 명절도 중반을 지났다. 도로는 시간이 갈수록 귀성 차량으로 북적이고 있다. 차 안에서 오가는 이야기의 대부분은 시댁에서 있었던 일들일 터. 제사 음식을 장만하고 식사 준비와 설거지를 하느라 손에 물이 마를 새가 없었던 기혼 여성들에게 이 순간은 ‘해방’의 기쁨을 만끽하는 동시에 시댁에서 겪었던 스트레스를 남편에게 되갚아줄 절호의 찬스다.
다음은 주부 A씨가 취재진에 보내온 사연 중 일부다. 아이가 없는 A씨는 명절마다 다음의 말로 인해 몹시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했다. 그 면면을 보면 이렇다. “왜 아일 안 낳니? 나이가 많아서 그러니?”, “실 가는데 바늘가고, 바늘 가는데 실 가는 거라고 했다. 이번 명절에도 혼자 올 거면 오지말거라”, “동서 왜 아기 안 가져? 애 안 들어서니? 그럼 낳지마. 요즘 둘이서도 잘 산다더라”, “지금도 늦었어. 언제까지 청춘일거 같니? 지금 낳아도 애가 대학가면 너 할머니 된다. 요즘 애들은 늙은 엄마 싫어해.”
쿠키뉴스 탐사보도팀은 앞서 이른바 ‘시월드’를 몸소 겪은(그리고 겪고 있는) 며느라기들의 증언을 전한 바 있다. 이번에는 ‘임신’과 ‘아이’에 대한 사연들을 소개한다. 명절날 듣기 싫은 말 중에 이들 항목은 매번 상위를 차지하고 있다. 이번 기사는 난임의 고통에도 불구, 취재에 적극적으로 참여, 취재진에게 본인의 경험을 기꺼이 공유해준 난임 여성들의 협조로 가능했다. 이들의 사연은 여성들이 감내해야 하는 삶의 모습이 어떠한가를 엿보게 한다.
◇ “애는?” 시댁만 가면 ‘고구마 100개’ 답답함
[쿠키뉴스 탐사보도] ▷“시댁에서 제가 살이 많이 쪄서 임신에 실패한다고 하더군요. 난임은 전부 여자의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저요, 168센티미터에 62킬로그램이거든요. 날씬한 건 아니래도 뚱뚱해서 임신이 안 될 정돈 아니거든요? 이 와중에 남편은 여자 연예인이 나오는 TV를 보고 있더라고요. 정말 ‘화끈한’ 설이었어요.”
▷“시댁에서 어쩌다 임신이나 난임, 시험관 시술 얘기만 나와도 어색한 분위기…. ‘남편한테 잘해라. 신경 쓰이지 않게 해라. 새벽 기도 나갈 것이다’ 이런 말만 잔뜩 하지, 위로가 되는 말은 전혀 없네요.”
▷“시어머니는 꼭 아들을 낳으라고 하세요. 목까지 이 말이 나와요. ‘어머님, y염색체는 남편이 갖고 있는거에요’라고.”
▷“설 차례를 마치고 나면 시어머니는 절 앉혀놓고 생밤을 입에 넣어주십니다. 다른 친척들에게 ‘애기 낳을 때까지 줄거야!’라고 하면서요. 명절마다 이러는데 저, 난임 치료 받는 걸 뻔히 알면서 말이죠. 속상해서 매번 울어요.”
▷“저희는 맞벌이 부부에요. 이번 설에 남편이 설거지를 도우려고 하니까 시어머니께서 이런 저런 이유로 주방에서 밀어내더군요. 웹툰 <며느라기>에서 그러잖아요. ‘얘가 뭘 하겠니’ 이러면서요. 시댁에선 남자와 여자, 겸상도 안합니다. 그러면서도 요즘 같은 시대에는 맞벌이가 당연하다고 말이죠.”
▷“시어머니는 저와 모녀처럼 지내고 싶으니 친하게 지내자고 하십니다. 며느릴 편하게 해주는 시댁이 어디 있냐고요. 제가 난임 치료를 위해 맞는 주사가 아파서 매번 운다고 하니 그러시더라고요. ‘모질고 독한 것. 일찍 와서 명절 음식 해놓거라.’ 아니, 좀 전까지 모녀처럼 지내자고 하신 것 같은데….”
▷“저희는 아직 애가 없어요. 시아버지의 말이 비수로 꽂혔어요. ‘아이 없이 살아도 된다. 너희 둘이 행복하게 잘살면 된다. 그런데 다른 손주를 예뻐하려니 며느라기에게 눈치가 보여 마음껏 사랑을 못준다.’ 남편에게는 아무 말 안하다 꼭 제게만 상처 주는 말을 하네요.”
▷“제사가 끝난 후 친척들과 식사를 하고 있었죠. 갑자기 시어머니가 제게 ‘넌 밥값도 못하는 애가 (아이도 못 낳으면서) 언제 밥값 할 거니?’라는 거예요! 시댁 식구들은 왜 아무렇지도 않게 심한 말을 할까요? 너무 상처를 받아요. 시댁 식구들은 정말 고구마 100개에요.”
▷“두 번째 유산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맞은 명절이었어요. 저 혼자 몇 십인 분의 설거지를 했어요. 회복이 안 된 상태라 식은땀을 줄줄 흘리면서 했죠.”
▷“몸이 힘든 건 참으면 되지만 정신적인 건 방법이 없어요. 시댁에 가면 꼭 그런 사람 있지 않아요? 시부모님도 아닌데, 왜 있잖아요. 명절이면 꼭 들르는 먼 시댁 친척들 말예요. 저만 보면 ‘애는?’ 이러면서 한마디씩 하는데 너무 짜증나요.”
◇ 시부모에게 잘하니 애를 셋이나 낳았다더라
▷“남편은 장남에 장손이라, 명절마다 아들을 낳아야 한다고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요. 한번은 저도 ‘그게 제 맘대로 되나요’라고 대꾸했죠. 그랬더니 ‘여자만 잘하면 된다. 맘을 곱게 써야 아기가 들어선다. 시부모한테 잘하면 아기가 온다’는 잔소리가 폭풍으로 쏟아지대요. 아니, 여자가 애 낳는 기계인가요?”
▷“유산을 하고 나서 시어머니가 한약을 지어준다며 오라더군요. 갔더니 ‘돌아가신 시할머니한테 애를 잘 점지해 달라고 빌자’는 황당한 소릴 들었어요. 어쩔 수 없이 시어머니를 따라 산소에 갔어요. 유산한 다음날이라 다리에 힘이 없어 산에 오르는데 너무 힘들더라고요. 겨우 도착해선 시어머니 말대로 ‘빌었죠’. 결과는? 여태껏 임신 소식 없어요. 어머님, 조상님, 듣고 계세요?”
▷“같이 식사를 해놓고 설거지는 저만 시키더라고요. 전 애가 없고 시댁 친척 언니는 애기 엄마라 그렇대요. 저 혼자 산더미 같이 쌓인 접시를 닦느라 혼났어요.”
▷“시어머니의 말이 정말 압권이에요. ‘강아지를 키우니까 임신이 안 된다. 개 갖다 버려라’, ‘부적을 들고 다니면 애가 생긴다’, ‘다른 집 며느리는 시부모한테 잘해서 애가 셋이나 생겼다’, ‘시부모한테 잘하면 복이 들어온다’, ‘자장면을 먹으면 임신이 안 된다’. 정말 주옥같지 않나요?”
▷“전 큰며느리인데 아직 아이가 없어요. 동서가 두 명인데 모두 애 엄마에요. 명절이 되면 늘 저만 음식 준비와 설거지를 도맡습니다. 두 동서가 얌체는 아닌데, 시댁 식구들이 제게만 일을 시키는 거예요. 애가 없으니 일하라 이거죠. 거실에서 다들 아이들의 재롱을 보고 웃고 떠들고 있을 때, 저는 혼자 허리 한번 못 펴고 설거지를 했어요. 그래도 수고했단 말 한번 못 들었어요.”
▷“시어머니에게 ‘제가 (시댁에) 일찍 갈게요’라고 했더니 ‘그러려무나. 하긴 네가 애가 있니 뭐가 있니.’ 이것뿐이게요? 시댁 식구 중에 꼭 이런 사람이 있어요. ‘이럴 때 애가 하나 있어야 분위기가 좋아질 텐데’라고 말이죠. 태몽을 꾸면 무조건 저희 부부에게 전활 합니다. 태몽을 사가라고요. 임신이 안 되면 되레 ‘꿈 값을 그것밖에 안주니 개꿈 됐네’라고 하는데, 정말 너무들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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