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혁민(가명·30)씨는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공시생’이다. 그가 기자에게 들려준 이야기를 편지 형식으로 전한다._편집자 주.
아버지, 흙수저여서 사는 게 힘들다고 소리치고 서울로 올라와 버려서 마음이 좋지 않았습니다. 제가 고시촌에 온지도 벌써 일 년이 지났습니다. 저는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습니다.
고시촌에 처음 왔을 때만 해도 잃을 게 없다고, 흙수저도 할 수 있단 것을 보여주려 했어요. 그때는 그런 자신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자신감은 금새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밤새 편의점과 PC방 알바를 마치고 학원에 가면 잠과의 싸움에서 저는 늘 지고 맙니다.
아버지, 제가 기거하는 고시원의 방 번호는 310호 입니다. 어제 돌아와보니 방문에 쪽지가 붙어 있었습니다. 방세가 밀렸다는 독촉 쪽지. 저는 한숨만 쉬었습니다. 고시원 방세는 한 달에 15만원입니다. 불을 켜면 바퀴벌레가 우글거리고 땀내와 지린내가 배인 누런 벽지의 쪽방에서 저는 천장을 쳐다보며 한숨을 쉽니다.
아버지, 저는 국방색과 검은색이 싫습니다. 군복과 트레이닝복이 지겹습니다. 군인과 고시생은 그래서 늘 초라해 보이나 봅니다.
아침 9시에 양복을 입고 학원이 아닌 회사에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야근이란 걸 해봤으면 좋겠습니다. 퇴근하면 맥주를 한 잔 마시는 그런 날이 제게도 올까요?
아버지, 책 속에 길이 있다는데 저보다 똑똑하고 성공한 사람들이 쓴 민법 책에는 어떤 길이 있을까요? 먼지 풀풀 날리는 고시 문제집에는 어떤 진리가 있을까요?
이것들만 달달 외우면, 그러면 저는 흙수저를 벗어날 수 있을까요?
김양균 기자 angel@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