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싫어하더라도 남자가 좋아할 때 성적농담도 하고 이렇게 접근하는 것인데…”
각계 성폭력 고발이 확산되고 있는 가운데 대한의사협회 회장 후보자의 미투 관련 발언이 도마에 올랐다. 성범죄의 엄중함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최대집 대한의사협회장 후보는 지난 8일 충청남도의사회가 개최한 회장 후보자 합동토론회에서 미투운동(#Me Too)이 ‘성적 행동을 지나치게 제한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당시 토론회에서 최 후보는 “사람은 남자든 여자든 성행동(sexual behavior)을 한다. 그래서 좀 싫어하더라도 남자가 좋아할 때 우리가 좀 이런 성적 농담도 하고 이렇게 접근하는 것인데 이걸 플러팅(flirting)이라고 한다”이라며 “이런 모든 것을 다 ‘성추행이다, 성희롱이다’해서 인간의 성행동을 너무나 제한시키는 것을 반대한다”고 말했다.
앞서 그는 “우월한 권력을 이용해서 상대방이 원치도 않는데도 부적절한 상당히 수준높은 성적인 행동을 하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것이고, 그 정도가 성폭력 근간을 이룬다면 당연히 형사적으로 엄중한 처벌을 받아야 된다”며 “하지만 의료계 내에서는 아주 소수일 것으로 생각한다”고도 주장했다.
이에 대해 대한민국 의사를 대표하고자 나선 의료계 리더로서 성폭력에 대한 인식이 너무나 안일한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플러팅(flirting)은 ‘성희롱’입니다
성적농담을 매개로 여성과 친해진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인식이다. 특히 권력계층에 있는 ‘엘리트’ 중년 남성의 생각이라면 더더욱 부적절하다. 상대방의 동의없는 성적 행동은 폭력이라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김보화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설연구소 울림 책임연구원은 “플러팅(flirting)은 그 자체가 희롱적인 의미로 음담패설이나 성희롱에 사용되는 단어”라며 “남녀가 만날 때 성적농담을 통해 친해진다는 것은 상당히 남성중심적, 권력중심적 인식이다. 누구의 입장에서 재미있는 농담인지 곱씹어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김 책임연구원은 “한국사회에서 이성애자 남성들, 엘리트층의 남성이 가진 사회적 위치에 대해 성찰할 마음이 전혀 없는 것이라 보여진다”며 “법과 제도의 변화도 중요하지만 장기적으로 다각적인 차원에서 인식개선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차인순 국회 여성가족위원회 입법위원관은 “성희롱의 가장 많은 형태가 언어적 행동인 음담패설”이라며 “말하는 사람은 즐거울지 모르지만 듣는 사람은 전혀 즐겁지 않다, 사적인 관계에서 오랜 신뢰관계 있는 사람이라면 모르겠으나, 상하관계, 업무관계에서는 불필요할 뿐 아니라 조직과 관계없는 사람에게도 부적절하다”고 의견을 더했다.
가해자들이 마음껏 ‘플러팅’을 즐길 수 있는 이유는 성희롱 등 성폭력을 규명할 의무가 이들에게 부여되지 않기 때문이다.
차 입법심의관은 “현행법상 성폭력은 폭행과 협박, 위계와 위력, 심신미약상태 등 3가지 요건을 갖췄을 때만 인정된다. 이 때문에 피해자들은 피해를 직접 입증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오히려 명예훼손과 무고죄로 2차 피해를 겪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법 구조가 ‘피해자가 저항을 했느냐, 증거가 있느냐’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이다. 법원이나 수사 과정이 피해자에 집중하도록 돼있어 오히려 피해자들을 숨게 만든다“며 ”좀 더 나아가서 ‘가해자가 상대방의 동의를 얻었느냐’를 중심으로 법안을 개정하는 전향적인 변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의사 성폭력 ‘소수’아냐…고통받는 피해자 보듬어야
의료계 내에서의 성폭력 등 성범죄가 소수일 것이라는 최 후보의 주장도 사실이 아니다. 경찰청 통계에 따르면, 2016년 기준 성범죄로 검거된 전문직 종사자(1067명) 중 의사는 118명으로 1위를 차지했다. 종교가(104명), 예술인(98명), 교수(33명), 언론인(10명), 변호사(9명) 등 전문직 종사자 가운데 가장 많았다.
지난해 대한전공의협의회 조사에서도 여성전공의 48.5%가 성희롱을, 16.3%가 성추행 피해를 입은 것으로 확인됐다. 전공의들도 성폭력에서 안전하지 못하다.
최근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이 발표한 ‘2017 보건의료노동자 실태조사 연구보고서’에서 성폭력 피해 경험자 2288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가해자가 의사인 경우는 14.1%로 나타났다. 보건의료노동자 10명 중 1명은 의사에 의한 성폭력 피해를 입은 셈이다.
박인숙 보건의료산업노조 부위원장은 “최소한의 젠더감수성, 인권감수성을 찾아볼 수 없는 발언이다, 미투운동으로 국민 전체가 피해자의 고통에 함께 눈물짓고, 성적 인권의식이 높아지고 있는 상황에서 그런 마인드를 갖고 있는 사람이 의사협회 대표자로 나섰다는 현실이 개탄스럽다”고 우려했다.
이어 박 부위원장은 “병원은 60개 직종이 함께 일하는 곳이다, 협업하지 않으며 환자 안전보장과 치료자체가 불가능하다. 의사들도 갑의 위치에서 내려와 환자를 치료하는 협업자로 구성원을 존중해야 한다. 직장동료이자 협업관계라는 마인드를 가지고 동료를 대하는 자세가 요구된다”고 당부했다.
의사 사회 내에서도 이러한 심각성을 인지하고 자정작용에 들어갔다. 한국여자의사회는 ‘의료계 성폭력 대응 매뉴얼’을 제작 중이다. 의료기관별로 제각각인 성폭력 매뉴얼을 하나로 통일해 보다 진전된 가해자를 처분 및 피해자 보호방안을 제시하겠다는 것이다.
신현영 한국여자의사회 이사는 “의료계 성폭력 문제는 드러나지 않은 채 암암리에 있어왔다. 주로 수직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들로 인해 나타난다. 여의사회 차원에서 자정작용이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을 갖고 시작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강제성은 없지만 그간 활동한 경험에서 성폭력 피해가 있을 때 여의사회 차원에서 경고를 내리고, 사후 모니터링 등을 한다면 자정효과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 복지부 산하의 수련환경평가위원회 등도 관심을 가지고 있다. 향후 결과물이 나오면 병원평가에 활용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최 후보는 해당 논란에 대해 “권력적 우월관계에서 성적 착취는 잘못된 것이다. 당시 발언 시간이 짧아서 오해가 있었다”고 해명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남녀 교제관계에 있어서 플러팅은 장난스럽고 긍정적인 의미이고 농담인데 이것을 엄격하게 성희롱, 성추행으로 규정해서 자연스러운 교제를 막지 말자는 것이다, 또 최근 성폭력 이슈에서는 무죄추정의 원칙을 배재하고 언론에서 많이 다루면서 피해자를 양산하고 있다, 증거주의로 가야한다, 조민기씨도 잘못했지만 자살까지 하지 않았느냐”고 덧붙였다.
전미옥 기자 romeok@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