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설 연휴에 투신한 서울아산병원 고(故)박선욱 간호사는 왜 죽음을 택했을까.
’태움’ 의혹에 대한 경찰 수사가 혐의 없음으로 종결되자, 초임 간호사의 안타까운 죽음의 원인은 다시 미궁 속에 빠졌다.
지난 19일 서울송파경찰서는 박씨 유족과 남자친구, 동료 간호사 등 17명을 참고인 신분으로 조사했다. 또한 경찰은 박씨 휴대전화와 노트북, 병원 폐쇄회로(CC)TV 영상을 분석한 결과 폭행·모욕·가혹행위 등은 발견하지 못했다며 사건을 마무리 했다.
그러나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높아지고 있다. 이번 기회에 태움의 명확한 원인과 실체를 파헤쳐야 한다는 것이다.
◇“박 간호사는 예민한 아이 아냐…병원이 사소한 실수로 달달 태운 탓”
경찰 수사 결과가 나오자 박 간호사의 유가족은 강하게 반발했다. 경찰이 제대로 된 수사를 했는지 의심스럽다는 주장이다. 유가족은 간호사연대를 통해 “진실을 알고싶다”는 입장을 재차 밝혔다.
유가족을 돕고 있는 간호사연대 소속 최원영 간호사는 “유가족이 가장 힘들어하는 것은 우리 아이가 이상한 사람이 아니었다고, 예민해서 자살할만한 아이가 아니라고 해명해야 하는 점”이라며 “그동안 유가족은 언론을 통한 마녀사냥을 우려해 괴롭힘에 대한 증거자료를 외부에 알리지 않았다. 그런데 경찰에 수사의지가 없으니 필요하다면 가해자가 누구인지도 (외부에) 알려야할 판”이라고 지적했다.
최 간호사는 유가족을 돕는 과정에서 증거자료 등을 확인한 결과 ‘통상적인 간호사 태움보다 심한 수준’이었다고 밝혔다
그는 “박 간호사가 환자의 PTGBD 배액관을 찢는 실수 이후 주치의와 간호사의 폭언이 없었는지, 보통 간호사 2명이서 하는 업무를 3개월 된 초임 간호사 1명에게 맡기는 것이 정당했는지, 사고 이후 병원 측의 적절한 조치가 있었는지 확인해야 한다”며 “실수 자체는 굉장히 사소한 것이다. 환자에게 치명적인 수준도 아니고 바로 후속조치하면 되는 사안이다. 그런데 그 실수에 대해 수간호사, 프리셉터와 면담을 나누고 12시간 동안 소송을 검색하고 죽음까지 생각했다. 투신직전 36차례나 소송을 검색했을 정도”라고 설명했다.
이어 최 간호사는 “서울아산병원에서 사직한 모 간호사도 태움이 심했다고 증언했다”며 “큰 소리로 누구라도 다 듣도록 'OOO 이상한 짓하고 있는지 보고오라'며 모욕감을 주고, 일하고 있는 간호사에 식사하라며 억지로 보낸 다음에 허겁지겁 먹고 돌아오면 왜 제대로 일을 안 끝냈냐며 혼내는 식이다. 이런 분위기가 사람을 말려 죽인 것”이라고 강조했다.
보건의료노조도 경찰조사에 실망스럽다는 입장을 밝혔다.
노조관계자는 “분명히 태움과 함께 장시간 노동, 업무스트레스가 있었다고 보인다. 그러나 경찰은 자살에 이르게 된 직접적인 이유에 괴롭힘이 있었는지는 판단하지 않기로 한 것”이라며 “빅5병원에 입사한 촉망받는 신규간호사가 6개월 만에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는 것은 분명 문제 사안이다. 유가족 입장에서는 억울한 죽음의 진상이 명확하게 규명됐으면 하는 마음일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태움’ 근본 해결책 달라…간호사 성토 잇따라
일선 간호사들도 ‘나도 너였다’며 유가족 편에 힘을 싣고 있다.
20일 간호사연대와 건강권 실현을 위한 행동하는 간호사회는 공동성명을 통해 故박선욱 간호사 사건의 재조사와 태움의 근본 해결책 마련을 병원과 정부에 요구했다.
공동연대는 “서울아산병원은 여전히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병원이 눈곱만큼의 자성도 보이지 않고 있는 가운데 경찰은 '이른바 태움 가해를 확인할 수 없었다'는 결론을 내리며 내사종결을 발표했다“며 ”지난 수 십 여 년간 태움은 늘 존재해왔고 방치돼 왔다. 태움은 없다고 말하는 것이 과연 타당하느냐“고 지적했다.
간호사연대는 간호사 태움의 원인이 기형적인 의료 시스템에 있다고도 비판했다. 이들은 “신규간호사가 혹은 간호사 1인이 혼자서 감당할 수 없는 업무를 짊어지고 일하는 것을 알면서도 방치하는 병원의 시스템 또한 간호사를 ‘태우고’ 있다”며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고통으로 몰아넣는 모든 행위가 바로 태움이고, 가해자에게는 인력부족과 과중한 업무라는 든든한 구조적 배경이 모든 가해를 일순간에 정당화시킨다”고 호소했다.
그러면서 이들은 “우리사회가 이번에도 고통을 외면하고 가해를 밝힐 수 없다는 변명으로 넘어간다면 또 다시 안타까운 죽음이 반복될 것”이라며 “서울아산병원은 더 이상 회피하지 말고 진상규명과 재발방지를 위한 구체적인 대책을 마련하고 경찰과 검찰은 다시 수사해야 한다. 보건복지부는 저비용, 고효율을 위해 병원에서 벌어지고 있는 끔찍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간호인력 충원과 법 제도 개선 등 구조적 체계를 바꿔야 한다”고 촉구했다.
박 간호사의 죽음과 관련해 서울아산병원 측은 내부 진상조사를 실시했지만 경찰조사와 마찬가지로 태움은 없었다고 결론지었다. 다만 이번 사안과 관련 병원 측은 현재 재발방지대책을 마련 중이라고 밝혔다.
서울아산병원 관계자는 “대책마련 내부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해 개선안을 마련하고 있으며 마무리 단계에 있다. 개선안에는 신입간호사 교육체계 개선, 프리셉터 업무경감 방안, 교육전담 간호사 신설, 병동별 인력충원안, 경력간호사 지속근무 대책 등이 담길 예정이다. 현재 필요한 인력 규모 등에 대해 노조와 조율 중”이라며 “논의가 마무리 되면 공식 발표할 예정이다. 교육 개선안의 경우 상반기 신입간호사 입사 후 바로 적용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간호인력대책, 병원 지원으로 그치면 안 돼…엄격한 인력기준 필요
정부도 간호사 태움 및 근무환경 문제의 엄중함을 인식하고 20일 간호인력개편안을 발표했다, 간호계는 과거에 비해 정부가 간호사 문제에 전향적으로 접근했다는 점에서 일단 환영의 뜻을 보였지만, 구체적인 대안이 명시되지 않았다는 점은 아쉽다고 지적했다.
건강권 실현을 위한 행동하는 간호사회 소속 이향춘 간호사는 “태움으로 인한 간호사 죽음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기 때문에 앞으로 방지할 대책이 중요하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좀 더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대책”라며 “태움의 근본 원인에는 인력문제가 있다. 인력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구체적인 방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이 간호사는 “우리가 기대하는 간호인력대책은 단순히 병원 사업장에 돈을 지원해주는 식이 아니라 각 병동별 환자 대비 적정 간호사 인력이 몇 명 수준인지 등 명확한 계획”이라고 강조했다.
대한간호협회도 간호사 인력문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협회 관계자는 “간호사 부족이 가장 대표적인 문제다. 간호1등급 병원조차 일반병동 간호사 1인당 환자 12~13명을 담당하는데 이는 선진국의 2~3배에 달한다. 그 와중에 프리셉터로서 신규간호사를 가르쳐야하는 입장이 되면 업무는 더욱 과중해진다”고 지적했다. 이어 “복지부의 개편안이 모두 이뤄진다면 해결될 여지가 없지 않다. 협회로서는 계속 지켜보겠다”고 말했다.
한편, 설 연휴 마지막날인 지난달 18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故박선욱 간호사 사망사건과 관련해 "문재인 대통령님, 간호사들의 고통을 외면하지 말아주세요"라는 제목의 청원이 올라왔다. 청원자는 "제발 간호사들을 더이상 벼랑 끝으로 밀어내지 말라"며 "중환자실에서는 간호사 1명당 1명의 환자만 담당하게 해달라"고 호소했다. 이 청원은 4만 5000여명의 동의를 얻으며 지난 20일 마감됐다.
전미옥 기자 romeok@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