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한예슬이 지방종 제거 수술을 받다가 의료사고를 당한 사실을 공개한 이후 의료사고 피해자들의 입증 책임을 완화해달라는 목소리가 확산되고 있다.
지난 20일 한예슬은 자신의 인스타그램을 통해 지방종 제거 수술을 받다가 의료사고를 입은 사실을 대중에 알렸다. 그는 수술부위를 찍은 사진과 함께 “수술한 지 2주가 지났는데도 병원에서는 보상에 대한 얘기는 없고 매일매일 치료를 다니는 제 마음은 한없이 무너진다”고 전했다. 한예슬의 수술을 담당한 차병원은 다음날인 21일 의료과실을 인정하고 사과했다.
그런데 일각에서는 병원이 의료과실을 즉각 인정한 것을 두고 만일 일반인이 당한 일이었다면 병원 측의 사과는커녕 의료과실로 인정받지 못했을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우리 사회에서 일반인이 의료사고 피해를 입증하고 보상까지 받아내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의료는 의사와 환자 간 ‘정보의 비대칭성’이 매우 큰 분야다. 따라서 환자 입장에서 의사의 과실 여부를 입증하기는 쉽지 않고, 의료사고 피해사실을 뒤늦게 파악하는 경우도 많다. 한국의료분쟁조정중재원이 발간한 2016년도 의료분쟁 조정·중재통계 연보에 따르면, 2012~2016년까지 5년간 의료분쟁 상담건수는 총 19만4554건에 달했지만, 조정개시 건수는 총 3229건으로 1.6%로 나타났다. 즉, 의료사고를 의심한 의료소비자 가운데 피해를 인정받은 이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또 의료사고 문제로 환자 개인이 병원에 책임을 묻기도 어렵다. 앞서 지난 2016년 11월 사망, 중상해 등 의료사고 발생 시 의료분쟁 조정절차가 자동 개시되는 내용을 골자로 한 ‘예강이 법’이 시행된 바 있다. 그러나 사망이나 중상해를 입을 정도의 의료사고가 아닌 피해자들은 여전히 개인이 까다로운 소송절차를 통해 과실여부를 입증해야 한다.
환자 입장에서는 의료분쟁조정절차도 쉽지 않은 과정이다. 임정대(가명·40)씨의 아버지는 대학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감염 및 낙상사고로 혼수상태를 지속하다 결국 사망했다. 이후 병원을 상대로 의료분쟁조정 절차를 진행한 임씨는 “의료분쟁조정 과정에서 조정원은 병원과 환자를 사과시킨다는 명목 하에 환자의 고충을 귀담아 듣지 않고 서류검토에만 치중했다”며 “조정원이 제시한 합의 금액 또한 피해규모에 한참 못 미쳤다. 그나마도 병원이 결과에 불복한다고 나서고 있어 현재 민사 소송을 준비 중”이라며 의료분쟁조정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그러면서 임씨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지금까지 병원은 단 한 번도 잘못을 인정한 적이 없다. 사고 당시에 아무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병원과 맞서야 하는 현실이 씁쓸했다. 의료사고 피해자를 위한 제도개선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김점례(가명·79)씨는 치과 치료를 받다가 되레 치아와 잇몸이 망가진 경험이 있다. 김씨와 가족은 의료진의 과실을 의심했지만 과실을 입증할만한 정보가 없어 결국 소송을 포기했다고 말했다. 김씨 보호자인 정인규(가명)씨는 “일반 환자가 과실을 증명할만한 자료를 얻을 수가 없더라. 이곳 저곳 알아보고는 결국 그만두기로했다”며 “우리 가족에게는 잊고싶은 기억”이라고 말했다.
의료사고로 남편을 잃은 황애순(63)씨는 "의료사고 피해자들은 진료기록부의 수정 기록도 확인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황씨는 "환자들이 당연히 알아야할 정보인데도 병원은 꼬치꼬치 캐묻고 여러 부서로 이관하더니 결국 줄 수 없다고 하더라. 병원은 우기면 그만인 셈이니 피해자 입장에서는 답답하다"며 "한예슬씨 사건이 안타깝지만 과연 일반인이었으면 그렇게 빠르게 대응했을까 안타깝기도 했다. 이번 일을 계기로 하루빨리 피해자를 위한 시스템이 마련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황씨의 남편은 담도염 시술을 받고 회복기간 중 음식물 주입과정에서 처치가 잘못돼 결국 사망했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한예슬 의료사고를 계기로 의료분쟁의 문제들이 쇄도하듯 올라오고 있다. ‘의료사고 피해자의 입증책임을 완화할 수 있는 법률 제정을 부탁합니다’라는 제목으로 지난 21일 올라온 청원은 벌써 2000여명의 동의를 얻은 상태다.
배우자가 의료사고를 당해 의료분쟁조정을 준비 중이라고 밝힌 청원자는 “의료분쟁조정을 준비 중이나 상대방이 조정절차에 응하지 않으면 조정이 불가능하며, 결국 민사소송에 착수해야 한다”며 “소액사건이라도 환자의 신체 감정 등의 복잡한 절차가 필요한데 피해자가 대응하기가 너무 어려운 것이 현실”이라고 전했다.
그러면서 “피해자의 입증책임을 완화시켜주는 법이 제정되었으면 좋겠다. 의료인들은 지나친 규제라고 생각하겠지만 분쟁이 발생하면 피해자가 지나치게 불리하다는 것을 고려하면 납득이 가능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며 “의료인들에게 그에 따른 책임있는 행동을 요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현재 의료분쟁조정원은 역할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다른 방법도 고려해야 할 것”이라고 썼다.
반면, 의료계에서는 안타까운 사고지만 현실적인 한계도 존재한다는 입장이다. 이세라 대한외과의사회 보험부회장은 “한예슬씨 사고는 지방종 수술에서 아주 드물게 발생할 수 있는 합병증이다. 다만 합병증이 생각보다 크게 나타나 환자 입장에서 너무나 안타까운 사고다. 보도된 사진만으로 보면 흉터는 아무래도 적지 않게 남을 듯하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이와 다른 면에서 안타까운 것은 지방종 수술 시 절개방식이 아니라 지방흡입으로 했다면 흉터나 회복기간 면에서 훨씬 나은 결과를 얻었을 텐데 아쉽게도 우리나라 건강보험법 안에서는 이 방법이 금지돼 있다는 점”이라며 “지방종과 같이 생명에 지장에 없는 질환은 비급여로 하되 치료법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방식의 건보법 개정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한편, 한예슬 의료사고와 관련해 차병원은 “현재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사진만을 기초로 판단한다면 성형외과적 치료를 통해서 흉터를 최소화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며 “한예슬씨가 전문적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전미옥 기자 romeok@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