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헌법재판소는 여성의 승낙을 받아 낙태를 도운 의료인을 처벌하는 형법 270조1항과 낙태한 여성 본인을 처벌하는 형법 269조1항이 위헌인지 확인해달라는 헌법소원에 합헌 판결을 내렸다. 5년여 시간이 흐른 지금, 낙태죄에 대한 논쟁은 여전히 뜨겁다. 여성의 권리와 태아의 생명권. 진정한 생명존중을 위한 길은 무엇일까. 낙태죄 위헌 여부를 논하는 헌재의 공개변론이 오는 24일 열린다. 긴긴 낙태죄 담론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을지 주목된다.
◇낙태죄는 인구정책 수단?
한국 사회에서 낙태(임신중절)는 죄다. 우리 형법 제269조와 제270조는 낙태행위를 전면 금지하고 있다. 다만 모자보건법상 강간, 근친상간, 유전학적·전염성 질환 등에 한해서는 제한적으로 허용한다. 낙태한 여성은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만원 이하의 벌금형을 받고, 임신중절 수술을 집도한 의료진은 2년 이하의 징역형을 받는다.
그러나 강력한 낙태금지 정책과 달리 우리나라의 낙태율은 OECD 국가 중 최고 수준이다. 2005년 보건복지부의 실태조사 결과 연간 낙태 건수는 34만 2000여 건, 가임기여성 1000명당 낙태율이 29.8명으로 나타났다. 2010년 실시한 낙태 조사에서는 16만8700여 건으로 감소했지만. 당시 낙태죄 단속을 강화한 배경을 고려하면 과소추계 가능성이 높다. 전문가들은 연간 30~50만 이상 인공임신중절이 이뤄지고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불과 90년대까지 만해도 여아낙태는 흔한 일이었다. 1990년의 경우 여아 100명당 남아의 성비가 116.5명으로 최악의 성비불균형을 기록한 바 있다. 자연성비는 105명 정도다. 앞서 산아제한 정책을 펴던 60년대에는 ‘낙태 버스’가 운영되는 등 국가가 임신중절을 권장하던 시절도 있었다.
낙태죄에 대한 단속은 저출산이 사회적 문제로 떠오르던 2009년경부터 시작됐다. 그러나 낙태죄 단속은 저출산 문제를 해소하지 못했다. 2010년 1.23명이었던 합계출산율은 2017년 1.05명으로 추락했다. 이는 OECD 회원국(평균 합계출산율 1.68명) 중 최저 수준이다.
낙태 제한정책은 낙태를 줄이기보다는 부작용을 양산하고 있다. 세계보건기구(WHO)와 구트마커 연구소는 “엄격한 낙태 제한정책이 안전하지 않은 낙태 비율을 높이는 요인”이라며 “낙태가 완전히 금지되거나 제한적으로 허용하는 국가에서는 낙태 4건 중 1건만 안전한 방법으로 이뤄졌으며, 낙태가 폭넓게 허용된 국가에서는 10건 중 9건이 안전하게 시행됐다”고 밝혔다.
이들이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세계적으로 매년 56000만건의 낙태가 이뤄지는데 이 중 45%(2500만 건)는 철사를 삽입하거나 독성물질을 복용하는 등 위험한 방법으로 행해진 것으로 분석된다.
◇여성의 자기결정권vs 태아생명권
‘낙태’에 대한 논쟁은 여성의 건강권 및 자기결정권과 태아의 생명권이 대립하는 형태로 이뤄져왔다. 낙태죄 위헌소송의 공개변론을 앞둔 현재도 낙태죄 폐지 반대 측과 찬성 측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가톨릭을 비롯한 종교계 등은 올해 초부터 최근까지 낙태죄 폐지론에 대한 대대적인 반대운동을 벌였다. 가톨릭교회는 지난 3월 교인을 대상으로 진행한 ‘낙태죄 페지 반대 100만인 서명운동’ 서명지와 탄원서를 헌법재판소에 제출했다.
또 지난달 18일에는 생명운동연합, 낙태반대운동연합, 한국기독교생명윤리협회 등 7개 시민·종교단체가 공동 집회를 열었으며, 지난 8일에는 생명윤리학계 등 대학교수 96명이 낙태죄 폐지를 반대하는 성명과 탄원서를 발표한 바 있다.
이들은 낙태 문제에 대해서 타협의 여지가 없다는 입장이다. 김길수 생명운동연합 사무총장(목사)는 “낙태는 여성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태아의 생명권이 달려있는 문제고 생명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라며 “생명은 합의의 여지가 없다. 물론 현실에서 어려운 면이 있지만 지원을 받도록 노력하면 된다. 생명을 소멸함으로써 해결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구인회 가톨릭대 생명윤리학 교수는 “낙태죄 폐지는 결국 생명을 경시하는 풍조를 키울 것이라는 우려에서 다양한 분야의 교수들이 동참했다”며 “태아의 생명권을 맘대로 좌지우지 하는 것이 여성의 권리라고 주장하는 것은 권리를 잘못 오해한 것이다. 모성과 사랑으로 포용하고 책임지는 것이 진정한 권리다”라고 주장했다.
반대로 ‘낙태 합법화’를 요구하는 사회적 목소리는 점차 커지고 있다. 지난해 11월 낙태죄 폐지와 자연유산 유도약인 미프진의 도입을 촉구하는 청와대 국민 청원에는 20만 명 이상의 국민이 참여해 청와대의 답변을 이끈 바 있다. 당시 청원인은 “원치 않은 출산은 당사자와 태어나는 아이, 국가 모두에 비극적인 일”이라며 낙태죄 폐지를 촉구했다.
임신중단 합법화를 요구하는 익명의 여성 모임 ‘비웨이브(BWAVE)’는 낙태죄 폐지 운동에 적극 나서고 있다. 이들은 오는 20일 홍대 거리에서 임신중단 합법화를 촉구하는 12번째 집회를 가질 예정이다.
비웨이브 관계자는 “태아가 생명인가에 대해서는 과학적으로도 논란의 여지가 있는 반면, 여성은 하나의 인격체고 우리 사회의 일원이다. 여성의 삶과 권리를 보장한다면 낙태죄는 폐지하는 것이 맞다”며 “지난해 청와대 국민청원에 이어 이번 공개변론이 낙태죄 폐지에 대한 국민적 요구를 반영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 낙태죄 논란, 현실을 직시해야
최근에는 여성의 자기결정권과 태아의 생명권이라는 이분법적 틀에서 벗어나자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방식으로는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기 어렵고, 실효성도 담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국회입법조사처는 최근 ‘낙태죄에 대한 외국 입법례와 시사점’ 보고서를 통해 낙태죄에 대한 현행 규제를 완화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보고서는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영국 등 세계적으로 많은 나라들이 태아생명 보호의 필요성을 충분히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에 비해 상당히 완화된 규제정책을 취하고 있는 것은 낙태 관련 현실과 법의 괴리를 줄이고 실효적 대응방안을 모색하기 위한 노력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제시했다. 현재 OECD 회원국의 80%(29개국)는 ‘사회 경제적인 사유’를 포함한 낙태를 허용하고 있다.
또한 보고서는 "우리는 현행법상 낙태를 거의 전면적으로 금지하기에 상담제도 등의 마련은 물론 낙태 관련 규정의 정비도 부족할 뿐 아니라 비의료기관 혹은 안전이 확보되지 않은 의료적 환경에서 음성화된 시술이 만연됨으로써 임부의 건강·생명이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고 지적했다.
여성계도 실효성 있는 논의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박은주 한국여성단체연합 활동가는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옳다 그르다에 그치는 탁상공론에서 벗어나 현실을 직시하고 다른 논의를 해야한다”며 “현행 낙태죄는 태아생명을 보호하지 못하고 여성에게도 안전하지 못한 불법 낙태로 내몰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박 활동가는 “사회구성원을 재생산하는 일은 여성뿐만 아니라 사회 공동의 책임이자 권리다. 이러한 재생산권을 어떻게 제대로 보장할 것인지 지속가능한 관점에서 짚어봐야 한다. 우리사회에서 구성원은 어떤 의미인지, 무조건 낳아서 해외 입양을 보내는 것은 괜찮은지, 미혼모의 상황은 어떤지 사회문제를 고려해 합리적인 방향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산부인과 의사들은 ‘현실적인 법 개정’을 촉구했다. 김동석 대한산부인과의사회장은 “낙태 관련 법안은 1973년 모자보건법 개정 이후 수년간 입법미비 상태로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며 “현행법으로는 무뇌아거나 태어나도 바로 사망할 것이 분명한 기형아의 경우도 낙태수술이 불법이다. 또 현실적으로 중학생이 임신했을 때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것이 사회적으로 용납되지 않는다. 내 자식이라면 무조건 낳으라고 할 것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김 회장은 “같은 법을 두고 과거에는 낙태를 권했는데 지금은 하지 말라고 한다. 분위기에 따라 달라지는 법 때문에 의사들도 고통을 받고 있다. 이번 기회에 명확한 결과가 나오길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지난해 청와대는 낙태죄 폐지 청원에 대한 답변에서 “현행 법제는 모든 법적 책임을 여성에게만 묻고 국가와 남성이 책임은 완전히 빠져있다. 여성의 자기결정권 외에 불법 임신중절 수술 과정에서 여성의 생명권, 여성의 건강권 침해 가능성 역시 함께 논의돼야 한다”며 낙태죄 문제에 대한 높은 이해도를 보인 바 있다.
그러나 지난 3월 유엔 인권위원회는 한국 정부에 지적한 낙태죄 폐지 권고했다. 그러나 정부는 사회적 논란과 합의를 이유로 수용하지 않았다. 임신과 출산에 대한 국제사회의 인권감수성이 나날이 높아지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 헌법재판소는 과연 어떤 결정을 내릴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
전미옥 기자 romeok@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