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보건기구(WHO)가 트랜스젠더를 정신질환 범주에서 제외하겠다고 밝혔다.
20일 의료계에 따르면 WHO는 2022년부터 적용되는 국제질병분류 개정판(ICD-11)에서 ‘성주체성장애(Gender Identity Disorder)’ ‘성전환증(Transsexualism)’ 등 트랜스젠더 관련 정신과질환 진단명을 삭제하기로 했다.
트랜스젠더의 상태를 정신질환으로 분류하는 것이 사회적 낙인을 강화한다는 이유에서다. 다만, 의료서비스의 필요성을 인정해 진단명을 성별불일치(Gender incongruence)로 변경하고, ‘성적 건강 관련 상태(Conditions related to Sexual Health)’라는 진단 범주(일반상담범주, 기존의 Z코드)로 옮겼다.
기존의 Z코드는 일반상담이 필요한 환자를 구분하는 범주로, 반드시 정신의학과 전문의가 아닌 일반의에게도 상담을 받을 수 있는 질환을 포함한다. 부부간의 불화로 인한 문제 등 질병으로 구분하지 않지만 정신건강에 우려가 있는 환자에 적용된다. 개정판에서는 F,Z와 같은 코드분류 방식도 변경된다.
WHO는 “성별불일치 상태(트랜스젠더)는 더 이상 정신장애가 아니며, 이를 질병으로 정의하는 것이 실제로 트랜스젠더에 대한 낙인을 야기할 수 있다”며 "중요한 변화는 정신의학 전문가가 아닌 일차의료제공자도 정신건강을 상담할 수 있도록 열어놓은 점"이라고 밝혔다.
WHO의 국제질병분류 개정내용(ICD-11)은 내년 5월 총회에서 회원국 간 논의를 거쳐 2022년 최종 적용될 예정이다.
이 같은 변화는 국내에도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한국표준질병사인분류(KCD)는 국제 기준인 ICD를 바탕으로 개정 및 호환되며, 보건의료 정책과 보험적용 등에 활용된다.
또 트랜스젠더의 병역면제나 성별정정, 성기수술 및 호르몬 치료 과정에서 정신과전문의의 진단이 선행되도록 한 기존 관행에도 변화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민성길 연세의대 명예교수(정신건강의학과)는 "개정판에서는 트랜스젠더에 대한 편견을 강화할 수 있는 질환명을 바꾸고, 분류 범주를 정신과질환이 아닌 포괄적인 범주로 옮긴 것이 특징이다. 정신과의사 뿐만 아니라 내과, 산부인과, 일반의사 등 다른 의사들에게도 의료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열어둔 것"이라며 "정신과전문의의 경우 보다 전문적인 진료가 가능하지만 현실을 고려해 환자의 접근성을 높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말했다.
백종우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정신보건이사(경희대병원)은 “트랜스젠더를 성적지향에 대한 다양성 중 하나로 받아들이고 그 자체를 정신질환으로 규정하지 않는 것이 최근 정신의학계의 추세”라며 “트랜스젠더 집단의 정신건강이 취약한 것은 사실이나 이를 사회적 적응의 문제나 개별 질환으로 인한 것으로 보는 관점”이라고 평가했다.
정신의학적인 치료과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오승준 대한정신보건연구회장(새하늘병원 정신건강의학과)은 “기존에 정신과에서도 성주체성장애 한 가지만 진단되기 보다는 우울증, 불면증, 약물의존이나 알코올중독 등 병합진단이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다수의 트랜스젠더들이 생활이나 직업면에서 보통의 삶에서 벗어난 사례가 많고 우울증, 알코올중독, 대인기피증 등 정신건강 위험성이 높다. 진료실에서는 주로 이런 영역을 치료하고 삶의 목표를 찾는 식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크게 달라질 것은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삶에 어려움이 있다면 병원이 아니더라도 종교기관, 상담기관 등 도움을 받는 것이 좋다. 정신건강의 키포인트는 고립되지 않는 것이다. 주변사람과 대화하고 대인관계의 폭을 넓히면서 사람을 많이 만나는 것이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전미옥 기자 romeok@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