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성범죄와 관련해 최근 정부가 퍽 유의미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28일 헌법재판소가 재판관 전원일치 의견으로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 제17조제1항을 합헌 결정한데 이어 오는 9월 14일부터 디지털 성범죄 불법촬영물 삭제 지원 및 구상권 청구도 시행될 예정이다. 그간 정부 차원의 방안을 마련하란 요구가 다소나마 받아들여진 최근의 움직임에 대해 여론도 긍정적인 평가를 내놓고 있다.
그러나 불법유출 영상의 주된 국내 유통 경로인 P2P 사이트 등 플랫폼 사업자에 대한 제재 여부는 미진한 것이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디지털 성범죄 피해 지원에 있어 단연 두각을 보이는 시민사회단체는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이하 한사성)이다.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이래 한사성은 상근 활동가 5명을 포함, 10명 안팎의 인원으로 피해자 지원은 물론, 여론을 통한 불법 유출 영상 근절을 위한 폭넓은 활동을 펴고 있다.
지난 26일 서울 대방동 서울여성플라자 4층에 위치한 한사성을 방문해 그간의 이야기를 들었다. 마침 승진·효린·서랑 활동가는 미국 출장으로 자릴 비웠고, 리아·여파 활동가가 기자를 맞아줬다. 디지털 성범죄 근절 최일선에 있는 이들 눈에 최근 정부의 방침은 어떻게 비쳐지고 있을까. 여러 이야기를 나눴지만, 결론은 플랫폼 사업자에 대한 정부의 ‘뜨뜻미지근한’ 태도로 이어졌다.
◇ 행동이 중요해
“아직 정부는 (디지털 성범죄의 심각성에 대해) 체감을 못하는 것 같다.” 리아 활동가의 말이다. 그는 정부의 불법 유출 영상 근절 방안에 대해 적잖은 아쉬움을 표했다. 온라인 유통 플랫폼 규제의 미비함을 지적하며 그는 정부의 인식 수준이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 최근 정부는 공중화장실 몰카 방지를 위해 시찰에 나서기도 했다.
헛다리를 짚는 것 같다. 전국의 화장실을 다 조사한다고 해도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그 정도의 노력을 다른데 쏟으면, 훨씬 더 좋은 성과를 낼 수 있다. 무엇보다 온라인 유통 플랫폼 규제가 시급하다. P2P 사업자들은 국내에서 합법적으로 운영을 하지만, 피해 촬영물을 계속 유통시키고 있다. 본인들은 책임이 없다지만, 범죄 영상을 팔아 수입을 거둬들이든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불법 영상은 저작권이 없다. 때문에 유포자들은 이를 더 확산시키고 돈을 벌수가 있다. 지금 이 시각에도 불법 영상이 유통되고 있지만, 방송통신위원회는 ‘자율규제를 한다’며 실효성 없는 방안만 내놓고 있다. 정부가 적어도 국내 사업자라도 강력한 의지로 개입하면 피해 규모를 물리적으로 축소시킬 수 있다. 이는 피해자의 고통을 경감시킬 수 있다. 정부 제재로 플랫폼 사업자들이 망하면 어떡하냐고 반문하더라. 여성을 범죄 대상화해 수익을 올리다 망한다면, 그런 플랫폼은 망하는 것이 옳다. 정부는 인터넷 사업자에 대한 태도를 바꿔야 한다.
- 아이러니한 건 해외사이트 제재의 어려움이 자꾸 부각된다는 데 있다.
국내부터 확실하게 제재해야 한다. 당장 할 수 있는 것부터 하고나서 해외사이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순서 아닌가. 국내 P2P 사업자들의 문제를 아무리 강조해도 정부는 해외사이트를 제재하는 것이 어렵다고만 말한다.
- 불법 유출 영상이 이미 산업화되고 있다고 우려하는데, 그 심각성이 어느 정도인가.
수요가 있어도 마켓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상황은 현재와 다르게 흐를 것이다. ‘국산몰카’ 혹은 ‘국민야동’이 한국처럼 산업화되어있는 경우는 찾아보기 유래를 찾기 어렵다. 한사성이 지원한 피해 영상물 중에서는 안 본 사람을 찾기 힘들정도로 퍼진 것도 있다. 국내 규제만 돼도 상황은 훨씬 나아질 것이다.
- 이러한 국내 규제 필요성에 대해 정부의 반응은 어떤가.
긍정적인 피드백은 받지 못했다. 제때, 제대로 실행 단계로 넘어가는 경우는 없었다.
- 답답한 건 피해자들일 텐데.
특히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해도 해결이 안 되어서 한사성을 찾는 피해자를 볼때면 마음이 아프다. 국가가 국민을 보호해주리라 믿었지만, 실상은 경찰에게서 2차 가해를 당하거나 속칭 ‘뺑뺑이’로 여러 담당자가 사건을 미루고 미루다 피해는 속수무책으로 커지고 만다. 이런 피해자들을 보면 답답해서 말문이 막힐 때가 많다. 피해 사실을 처음 인지하자마자, 한사성을 찾는 피해자들도 있다. 우린 피해 영상의 첫 발견 단계부터 고소장 작성, 변호사 선임까지 전 과정을 함께 싸운다.
- 피해자들이 어떤 상황일지 솔직히 상상도 되지 않는다.
우린 피해자들이 디지털 성범죄로 인해 히키코모리나 자살 같은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전형적인 피해자의 모습으로 비쳐지는 것을 경계한다. 다양한 피해자들이 있다. 놀랄 만큼 잘 극복하는 경우도 많다. 개인적으로 인연이 닿은 사람이 작년에 자살했다. 한사성에 상담하도록 설득하고 함께 대응하려고 했지만, 결국 지원이 이뤄지진 못했다. 한 명이라도 더 본인 영상을 보는 것을 너무나도 고통스러워했다. 결국 피해자는 손쓸 틈도 없이 스스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그의 죽음은 디지털 성범죄의 피해 사례로 집계되지 않을 것이다. 이런 경우가 얼마나 많을까. 범죄 영상의 심각성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 “불법 유출 영상은 범죄다”
한사성은 개소이래,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 지원을 위해 동분서주했다. 이전까지 피해자들은 불법 유출 영상 삭제를 위해 사이버장의사를 찾아가 그들이 요구하는 200~300만원의 비용을 내야만 했다. 이에 대해 한사성은 “여성에 대한 폭력을 도구화해 여성들을 향한 여러 형태의 착취를 용인하게 만들었다”고 지적한다. 한사성이 개소 후부터 주력한 활동은 무료로 불법 영상 삭제 지원을 하고 피해자지원 프로세스를 구축한 이유다. 산업화된 여성폭력의 고리를 끊으려는 이유에서였다.
지난해 9월 26일에 국무조정실은 ‘디지털 성범죄 종합대핵’을 발표했다. 발표의 토대는 한사성이 그간 피해자 지원에서 익힌 경험과 노하우, 프로세스를 제공해 이뤄진 것이었다. 한사성은 앞서 정부의 ‘디지털성범죄 종합대책’ 간담회에 참석해 사이버성폭력 피해 촬영물 유통 플랫폼을 향한 강력한 규제, 사이버성폭력 가해자 처벌을 위한 국제 수사공조 요청, 국가차원의 사이버성폭력 피해자 지원 등 현장의 목소리를 가감 없이 전했다. 이전에는 없었던 대책들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국회에서도 디지털 성범죄는 단연 이슈의 중심에 섰다. 사이버성폭력 전담부서를 신설해야 한다는 제안이 국회 정책토론에서 제기됐고, 올해 3월 경찰청은 사이버성폭력 수사 전담부서를 마련했다. 토론회를 주관한 것도 한사성이었다.
한사성이 관심을 두고 진행한 일 중에는 이 사안에 대한 심도 깊은 담론의 생산이다. 이에 대해 한사성은 “사이버성폭력의 정의, 특성, 원인분석, 용어정리, 지원방향 등에 대해 깊은 수준의 담론을 통해 이를 중심으로 피해자지원 및 대중 인식개선의 방향성을 제시해야 한다”는 견해를 여러 방법으로 제안했다.
여포 활동가는 “담론은 디지털 성범죄가 ‘왜 나쁘고 왜 폭력적인가’를 깊이 있게 논의하기 위해 필요하다. 올해 하반기 포럼을 통해 디지털 성범죄 담론을 다룰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밖에도 한사성은 ▶사이버 성폭력 피해자 지원을 위한 해외 NGO 연대체 구축 ▶사이버 공간의 촬영물을 이용한 성폭력 실태조사 및 모니터링 ▶피해지원 및 모니터링 활동을 바탕으로 사이버성폭력 근절을 위한 연구 사업 등을 진행하고 있다. (계속)
김양균 기자 angel@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