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지도자는 군사적 전략 요충지를 선점하는 것이 전쟁 승리의 필수 조건으로 삼는다.
한반도의 지리적 여건상 울릉도와 독도는 동해의 중요 거점 지역으로 분류되며 군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곳이다.
1904년 9월 러일전쟁을 준비하던 일본은 독도의 영토 편입을 적극적으로 추진한다.
당시 일본 외무성의 정무국장인 야마자엔지로는 “이 시국이야말로 독도의 영토 편입이 필요하다. 독도에 망루를 설치하고 무선 또는 해저 전선을 설치하면 러시아의 적함을 감시하는데 최적이다”며 독도 침탈을 본격화 했다.
그러나 1877년 일본 메이지 정부가 견지하고 있던 “독도는 한국의 영토이다”라는 인식이 각료들 사이에 팽배했기에, 일본 내무성의 서기관인 이노우에는 독도편입을 반대했다.
“한국 땅이라는 의혹이 있는 독도를 편입할 경우 일본을 주목하고 있는 외국 여러 나라들에 일본이 한국을 병탄하려고 한다는 의심을 크게 갖게 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1905년 1월, 결국 일본은 러일전쟁이라는 침략 전쟁 중에 한반도 침탈의 첫 희생물로 독도를 자국의 영토로 침탈하는 조치를 강행했다.
침탈의 이유로, 처음에는 독도가 주인이 없는 땅이라며 ‘무주지 선점’이라고 했다.
그러나 명분이 불리해지자 두 번째로 독도에 대한 ‘영유의사 재확인’하는 조치라며 말을 바꾸게 된다.
일본의 주장이 이랬다, 저랬다 하는 것은 그만큼 독도에 대한 역사적·지리적·국제법적으로 근거가 미약하기 때문이다.
1939년 9월 아돌프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 독일군의 전차군단이 폴란드 서쪽 국경을 침공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됐고, 이후 일본 제국도 동아시아를 침공하게 된다.
그러나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8월 9일 나가사키에 미국의 원자폭탄이 투하됨으로써 8월 15일 일본제국은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게 된다.
이와 함께 대한민국도 일본의 식민지 시대에서 벗어나 독립을 맞이하게 된다.
결국 제2차 세계대전은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인명 피해와 재산 피해를 남긴 가장 파괴적인 전쟁이란 기록을 남기며, 1945년 9월 일본제국의 항복 문서 서명으로 끝났다.
종전과 더불어 일본은 폭력과 탐욕에 의해 탈취한 모든 지역으로부터 축출돼야 한다는 카이로선언 등 전후 연합국의 조치에 따라 독도는 당연히 한국의 영토로 회복됐다.
일본이 독도 영유권을 주장할 때마다 한국인은 일제의 한반도 침탈이라는 과거 불행했던 역사를 떠올리게 된다.
우리는 일본과 함께 바른 역사 인식을 토대로 평화와 번영을 이루어 나가는데 협력해 나가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일본이 독도에 대한 잘못된 영유권 주장을 중단해야 한다.
그래야만 독도로 인해 발생하는 한일 간의 갈등을 해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독도에는 한국의 경찰, 공무원, 주민 등이 거주하고 있으며, 매년 20만 명 내외의 국내외 관광객이 방문하는 아름답고 평화로운 섬이다.
남북 정상회담이 역사상 처음으로 4월 27일 판문점에서 열렸고, 두 정상이 세계에 한반도가 평화를 염원한다고 확인시켰다.
평화의 상징인 독도에서 남북 정상회담이 이루어지길 희망한다. 독도는 위대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