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이하 한사성) 초반, 이들은 사무실이 없어 카페 등지를 전전하며 일을 했다. 여파 활동가의 말을 들어보자. “서랑이 사는 반지하방 옆방 한 칸을 매달 3만원에 빌려서 했었어요. 나름대로 개소식을 한다며 사람들 불러서 파티도 했죠.”
현재도 한사성의 재정 상황은 빠듯하지만, 당시는 더 열악했다. 서랑 활동가는 “모든 활동비를 사비로 충당했다”고 말했다. 수입이 없는 상태에서 최소한의 비용으로 매일을 버텼다. ‘돈 안 되는’ 일을 하느라 매일 바쁘게 움직였지만, 일 하며 숨만 쉬어도 ‘돈’이 들었다. 여파 활동가는 “밖에서 일만 하는데도 각자의 돈이 많이 들었다”고 했다.
“카페에서 일을 할 때가 많았는데, 테이블이 좁거나 노트북 콘센트를 이용하기 어려운 문제가 있었어요. 저희도 사람이니까 밥은 먹어야 하잖아요. 밥을 먹고 카페에 들어가면 다시 돈을 내야하고요. 또 한 사람씩 음료를 시켜야 하니까 부담이 됐어요.”(서랑)
일을 하면서 늘어난 건 가방의 무게뿐. 서류를 보관해둘 곳이 마땅치 않아 배낭에 짊어지고 다녔다. 노트북과 대학 전공서적 3권을 합친 것보다 많은 짐을 넣은 배낭은 지퍼를 잠그기도 힘들었다. 무거운 백팩을 맨 모습이 ‘거북이 등딱지’나 ‘피라미드 공사장 인부’ 같지 않느냐는 ‘웃픈’ 농담이 오가던 시절이었다. 서랑이 말했다.
“기력이 떨어지고 지친 상태에서 가방이 너무 무거우니까 지하철 계단에서 자꾸 뒤로 휘청이는 거예요. 종종 낮 동안 비어있는 아카데미 공간을 빌려 쓰기도 했었는데, 여름이라 에어컨을 켜고 싶어도 눈치가 보여 켜지 못했어요.”
서랑 활동가가 기거하던 반지하방 인근에는 소규모 공간이 있었다. 두 평 가량의 넓이에 앉은뱅이책상 하나가 전부인 공간이었다. 활동가들 전부의 노트북을 올려놓기도 어려운 좁고 열악한 환경이었다. 멀기도 멀었다. 판교와 수원 등지에 살던 활동가들은 이곳에 오려면 2시간 이상이 걸렸다. 서랑 활동가는 “힘이 있는 날은 그곳 반지하에서, 힘이 없는 날은 중간지점의 카페에서 일을 했다”고 말했다.
이런 생활이 반년 가까이 지속됐다. 그 와중에도 이들은 부지런히 사업기획서를 썼고, 사업을 수행했다. 피해 지원 프로세스 구축이나 내부 조직화도 계속 진행됐다. 해야 하거나 하고 있는 일은 점점 늘어났고, 이에 비례해 무거운 가방이 점점 더 무거워지는 사태가 발생했다.
“그때 경험을 바탕으로, 현재는 사업계획서나 사업수행을 능숙하게 해내고 있어요. 결과도 좋고요. 당시는 소규모 사업도 계획서 작성에 온 신경을 다 썼어요. 엉뚱한 곳에 ‘이게 중요하다’고 계획서를 내밀기도 했어요. 공모에 떨어지면 저희들끼리 ‘이렇게 중요한 사업을 어떻게 떨어뜨릴 수 있느냐’고 했죠.”(여파)
“당시에는 불법촬영물을 이용한 성폭력에 대한 담론이 별로 없었어요. 지금처럼 국민적 이슈도 아니었죠. 때문에 담론이나 운동의 방향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더 어려웠어요. 어떤 결정 하나를 해도 긴 회의가 필요했습니다. 회의를 하는 방법도 만들었죠.”(서랑)
효율적인 회의를 하기 위한 토의도 진행했다. 이들이 업무 프로세스를 구축하던 당시 애용하던 것은 ‘전지’였다. 서랑 활동가는 “전지를 펼쳐놓고 끝까지 채우기를 반복했다”고 말했다.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서랑은 “되게 힘들 것 같다”고 했고, 여파는 “막막해진다”며 웃었다.
◇ 첫 국회 토론회
지난해 7월 7일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는 유승희·진선미·권미혁 의원실과 함께 사이버성폭력 입법 정책 개선방향을 주제로 국회 토론회를 진행했다. 사이버 성폭력 관련 법의 미비함 때문이었다.
“얼마나 품이 많이 드는지 알았다면 못했을지도 몰라요. 의원실에 제안서를 돌리고 연락이 오면 열심히 자료를 준비해서 브리핑했습니다. 지금 보면 문서도 서툴렀죠.”(여파)
다만 ‘필요하니까 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토론회를, 그것도 국회에서 진행한 경험이 전혀 없었던 젊은 활동가들은 밥 먹듯 밤을 새며 토론회를 준비했다. 처음 국회에 갔던 그 날을 여파 활동가는 다음과 같이 기억했다.
“공식적인 자리에 청바지 차림으로 갈 순 없다며 없는 돈에 옷을 사 입었습니다. 국회에선 한사성의 활동 시작을 기념하는 사진도 찍었죠.”
담론이나 방향, 법 개정의 구체적인 내용을 보고서와 정제된 언어로 만드는 과정은 고생스러웠지만, 한사성이 성장하는데 적잖은 자양분이 됐다. 이를 위해 활동가들은 밤을 하얗게 지새우곤 했다. 그 덕분인지, 현재 여성인권 및 사이버성폭력과 관련해 한사성의 입지는 퍽 단단하다. 물론 처음부터 그렇진 않았다.
“지금은 그래도 단체 모양이 자릴 잡혀 있기도 하고, 언론 보도나 인터뷰 기사가 나가기도 하니까 부모님께서 ‘아주 허튼짓을 하진 않나보다’고 생각하시겠죠. 그때만 해도 ‘도대체 뭘 하고 다니느냐’고 물으면 저조차 말문이 막히곤 했어요(웃음).”
한사성 활동가들은 앞뒤를 재지 않는다. 계산을 많이 하지 않는다. 그저 당장 눈앞에 닥친 사이버 성폭력을 이대로 둬선 안 된다는 의지와 실행력이 남다를 따름이다. 이들은 ‘그냥 해야 한다’고 여기는 일을 그저 묵묵히 한다.
“매일 계단을 올라갔고 그 계단들이 쌓여서 나아가고 있어요. 지금도 날마다 계단을 올라가는 것 같아요.”(서랑)
◇ 피해자들이 원했던 건 ‘삭제’
불법영상으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가장 원하는 건 불법영상의 ‘삭제’다. 한사성이 불법영상 삭제 지원 프로세스를 만드는데 많은 공을 들인 이유다. 그러나 프로세스 구축은 결코 만만한 작업이 아니었다.
“피해 지원을 어떻게 할 수 있고, 어떤 구조로 프로세스화 해야 하는지 고민이 많았습니다. 타 성폭력 피해자 지원 단체에 조언을 구하기도 했죠. 그러나 결국 만들어나가는 건 우리이고, 사이버 성폭력은 성격이 다른 성폭력 피해이기 때문에 ‘맨땅에 해딩’하는 심정으로 임했습니다.”(서랑)
피해자로부터 전화가 오면 최초 응대를 어떻게 할 것인지를 포함해 피해자 상담에 대한 스크립트를 수차례의 논의를 거쳐 완성해갔다. 난관은 또 있었다. 바로 피해자에 대한 무료 법률 지원이었다. 비영리단체에 법률지원 해주는 곳에 미팅을 요청했다. 그러나 적극적인 반응을 보이는 곳은 많지 않았다.
“우선 비영리단체를 지원하는 법무법인이나 법률 지원 단체가 적고, 이 중에서도 피해자를 직접 지원할 수 있느냐는 요청에 대해 당시 한사성의 공신력 등이 확보되어 있지 않은 상태여서 적극적인 반응을 보이는 곳은 별로 없었어요. 만남 신청을 하면 한달 후에 연락이 갈 것이라는 반응 등을 보였죠. 고민이 많았어요.”(서랑)
그러던 와중에 한 법무법인과의 접촉이 성사됐다. 한 여성 변호사는 한사성의 만남 제안에 곧장 회신을 보냈다.
“‘너무 돕고 싶다. 이 의제에 관심이 많다. 안건으로 올리겠다, MOU를 맺자’는 제안을 받았어요. 그렇게 초기 피해자 법률지원 프로세스가 만들어졌습니다. 이후 피해자 지원을 위한 크라우드펀딩이 진행됐고, 펀딩으로 모인 돈으로 피해자에게 직접 변호사를 선임해줄 수 있었어요.”
한사성이 비영리 여성인권단체로 등록된 이후에는 정부의 위기지원센터 등을 활용하며 피해자에 대한 법률지원이 진행되었다. 물론 그 과정에도 수많은 문서와 양식, 자원들, 그리고 활동가들의 노력이 쏟아 부어졌다. 지난한 시간들이었다.
◇ 불법영상, 삭제 지원을 하기까지
한사성 활동가들은 모두 ‘문과’ 출신. 컴퓨터의 전선이 얽혀있어도 당황하던 이들이 불법영상을 삭제 지원하는 방법은 ‘맨땅에 헤딩하기’나 다름없었다.
“모니터링을 하면서 실제 삭제 방법을 찾곤 했는데, 이런 작업을 해본 적이 없었어요. 하나하나 알아가기 시작했습니다.”(여파)
국내 사업자 중 사이트가 등록된 리스트를 찾아 하나씩 확인하고, 촬영물을 찾을 정보를 입력하길 반복했다. 아울러 불법영상이 유통되는 포르노 사이트의 경우에는 남성 위주의 온라인 커뮤니티 내에서 공유되는 사이트 리스트를 이용, 리스트를 더 구체화하고 확장시켰다.
“우리가 찾아낸 정보들을 토대로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다 효과가 있으면 프로세스로 만들고 다시 회의를 해서 프로세스를 수정하길 수도 없이 반복했습니다.”(서랑)
◇ 활동가들의 생계와 삶은 누가?
조직도 안정화되고 피해자 지원 프로세스도 구축이 되었지만,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게 있다. 가진 자원이 없기 때문에 자기희생이 불가피한 상황에서 이들이 바라고 있는 건 되레 지금의 일에 더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는 것이었다. 서랑 활동가는 직업 활동가로서의 삶에 대해 이야기했다.
“1년 만에 첫 월급으로 20만원을 받았어요. 너무 신나서 사진도 찍고 그랬죠. 직업 활동가로서, 세상을 바꾸는 것을 저의 업으로 삼은 지금, 비록 미래가 보장되진 않지만 월급이 200만원이 되는 그런 기적이 생기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지금 사무실도 얹혀 지내는 것이라 업무 공간이나 활동비 마련을 위해 함께 해주시면 너무 감사할 것 같습니다.”
여파 활동가는 “다른 걱정 없이 이 활동만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동료들이 생계를 위해 알바를 하지 않고 한사성 활동만 한다면 훨씬 더 일을 하고, 그로인해 더 좋은 영향을 우리사회에 미칠 수 있을 거예요. 한사성이 활동을 더 잘할 수 있도록, 그래서 세상이 더 빨리 바뀔 수 있도록 함께 해주세요.”
*다음카카오 스토리펀딩 플랫폼에서 ‘사이버성폭력 잡으러 한사성이 간다’에서 후원이 가능하며, 아울러 기획 의도와 연재물을 볼 수 있습니다. 김양균 기자 angel@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