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충남 천안의 한 시골 동네. 배 과수원을 운영하던 방씨네 두 딸은 그룹 H.O.T.의 열렬한 팬이었다. TV 장식장에는 H.O.T.가 출연한 방송을 녹화한 비디오테이프가 그득했고, 집에 놀러온 사촌 동생들에겐 H.O.T.의 춤과 노래를 스파르타식으로 가르쳤다. 그렇다. 나도 그 사촌동생들 중 하나였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학습된 팬심이 20여년 만에 다시 불타올랐다. 지난 13일 서울 잠실종합운동장 주경기장에서 열린 H.O.T.의 콘서트 ‘포에버 하이파이브 오브 틴에이저’(Forever High-five Of Teenager)에서다.
1990년대를 호령했던 다섯 남자의 인기는 2018년에도 유효했다. 공연장엔 전날부터 ‘밤샘족’이 등장했다. MD 상품을 구매하려는 팬들이었다. 밤부터 몰려든 팬들은 다음날 새벽 긴 행렬을 이뤘다. 오전 9시부터 판매를 시작한 상품들은 1시간이 채 안 돼 매진되기 시작했다. 모자와 마스크가 특히 인기였다. 1인 1개로 구매 수량을 제한했던 야광봉과 우비도 공연 시작 전 동이 났다.
많은 관객이 몰린 덕분에 공연은 15분가량 지연 시작했다. ‘전사의 후예 - 폭력시대’로 공연을 시작한 H.O.T.는 ‘늑대와 양’, ‘투지’, ‘더 웨이 댓 유 라이크 미’(The Way That You Like Me), ‘아웃사이드 캐슬’(Outside Castle), ‘열맞춰’, ‘아이야’를 연달아 불렀다. 이재원을 제외한 모든 멤버들이 나이 40줄에 들었지만 눈빛은 10대 시절과 다르지 않았다. 문희준의 ‘가위손’은 그대로였고 장우혁의 춤은 여전히 불꽃놀이보다 화려했다.
7곡을 쉴 새 없이 부른 뒤에야 멤버들은 입을 열었다. 문희준은 “17년 전 공연에서 ‘저희는 절대 덜어지지 않습니다’는 말을 했는데, 그 후로 다시 무대에 서기까지 너무 긴 시간이 걸린 것 같아서 죄송한 마음이 앞선다”며 “17년 전에 했던 약속을 지킬 수 있게 우리를 지켜줘서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고 했다. 토니안과 장우혁은 “실감이 나지 않는다”고 입을 모았다.
H.O.T.는 댄스 그룹으로 인기를 모았지만 이날 공연에선 발라드곡도 다수 선곡했다. 이들의 재결합을 도운 MBC ‘무한도전 - 토요일 토요일은 가수다3’ 엔딩곡으로 쓰였던 ‘너와 나’, H.O.T. 결성 당시의 각오를 녹인 ‘우리들의 맹세’ 등이었다. 소년소녀 가장을 위한 노래였던 ‘내가 필요할 때’는 이날 수 만 명의 청중에게 날아들어 위로를 전했다. 관객들은 일제히 ‘기다렸어 H.O.T.’라고 쓰인 현수막을 들고 H.O.T.를 응원했다.
‘캔디’(Candy)는 공연장 한가운데서 불렀다. 전주가 흐르자마자 관객들은 일제히 기립해 뜀박질했다. 활동 당시를 고스란히 재현한 의상에 멤버들도 감탄했다. 뒤이어 또 다른 히트곡 ‘행복’이 흘렀다. 멤버들의 발걸음이 향하는 쪽으로 관객들이 우르르 달려가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또 강타가 리처드 막스의 ‘라잇 히어 웨이팅’(Right Here Waiting)을 부른 걸 시작으로 멤버들의 솔로 무대가 이어졌다. 장우혁은 ‘시간이 멈춘 날’과 ‘지지 않는 태양’을, 문희준은 ‘파이오니어’(PIONEER)를 불렀다. 토니안은 개그맨 양세형이 피처링한 ‘핫 나이트’(Hot Knight)를 이날 처음 공개했고 이재원은 ‘아임 소 핫’(I'm So Hot)과 ‘어 베러 데이’(A better day)를 불렀다. 특히 ‘어 베러 데이’는 장우혁, 이재원, 토니안이 결성한 JTL의 노래로 팬들에겐 ‘아픈 손가락’ 같아 더 큰 환호를 얻었다.
H.O.T.는 마지막 곡 ‘위 아 더 퓨처’(We Are The Future)를 부르기 전, 전광판에 ‘2019’라는 자막을 띄워 이후의 활동을 암시했다. 앙코르 곡으로는 ‘고우! 에이치오티!’(Go! H.O.T.!), ‘캔디’, 그리고 ‘빛’이 선곡됐다. 멤버들은 공연장을 떠나기 아쉬운지 거듭 ‘빛’의 마지막 구절을 반복해 불렀다. 관객들의 ‘떼창’ 속에서 서로를 힘껏 껴안기도 했다. 이재원은 “오늘 이 무대가 H.O.T.의 새로운 페이지를 쓰는 것이 되길 바란다”고 했다.
공연은 14일에도 이어진다. 첫날과 마찬가지로 5만 명의 관객이 몰릴 것으로 예상된다.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